"우리" 아기

왜 내 아기가 우리의 아기?

by 까치

‘우리’라는 말은 어릴 때부터 너무 익숙해서, 특별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을 정도로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다 우리라는 단어에는 깊은 공동체 기반의 문화가 담겨 있다는 것을 해외에 나와서야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었는데 예를 들어 내가 사는 이곳에서는 ‘우리 아기’, ‘우리 엄마’처럼 ‘우리’를 쓰는 표현을 거의 들을 수 없다. 대신 ‘나의 아기’, ‘나의 나라’, ‘나의 엄마’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다. 우리보다 나를 더 중시하는 개인주의 사회에 살다가, 올해는 한국으로 돌아와 출산했다.



재미있게도 아이를 낳는 순간, 나의 아기는 곧바로 우리 아기가 되었다. (우리 임산부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도 해본다. 배려도 많이 받지 않을까) 산부인과에서도, 길거리에서도,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나의 아기는 어느새 우리의 소유물, 우리의 돌봄이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이번 장거리 비행에서도 여김 없이 사건이 일어났다.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아기의 체온을 걱정하며 같은 질문을 열 번은 넘게 반복했다. 그 정도면 질문이라기보다는 거의 강요처럼 느껴질 즈음, 옆자리뿐 아니라 뒷자리의 할머니까지 와서 똑같은 질문을 건넸다.


"애기 안 춥다고요!" 허탈하게 웃으며 이제 그만 좀 물어보시지? 하는 힌트를 주니 아주머니는 "아니, 한국은 아기를 따듯하게 키우는 편이니까.."라고 대답하시며 그래도 아기가 추워 보이는 데라는 눈길을 거두시지 못했다. 한국은 공동체 기반의 사회라서, 특히 아기나 아이를 보면 순식간에 공동육아가 시작되는 느낌이다. 관심과 염려가 반갑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너무 가까운 간섭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네덜란드에도 ‘우리’라는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유럽 남부 지역으로 내려가면 개신교보다는 가톨릭의 영향을 받은 도시들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축제도 더 화끈하게 열고, 술도 많이 마시고, 집도 화려하게 꾸미며 ‘우리 아기’, ‘우리 엄마’ 같은 표현도 사용한다. 그 단어사용에 걸맞게 공동체 기반의 사회고 사람들 간의 관계도 매우 가까운 편인 것 같다.


문화라는 것은 지리적 위치에 따라, 그리고 그에 따른 역사적·사회적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르게 형성된다는 것이 여전히 신기하게 느껴지는 요즘 ‘서로 터치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익숙한 네덜란드에선, 내가 카페에서 와인을 마시며 아기를 보든, 산후조리가 끝나자마자 바로 일을 복귀하든 별 상관하는 사람이 없다. 그 점이 오히려 해방감을 준다.


한편,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들조차 임신, 출산을 겪은 내 몸 상태나 육아의 힘든 점에 공감하며, 마치 자기 일처럼 신경 써주거나 염려해 주는 그런 따뜻한 정서도 나름대로 재미있을 때가 있다.(아줌마가 되어가는 과정?)


하지만 특히 한국에선 대부분의 경우에 그 ‘함께’가 내 의사와 무관하게 시작될 때가 많다. 어떤 경험은 긍정적이며 어떤 경험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스럽기도 하다. 근데 또 그 안에 묘하게 끈끈한 공동체의 힘도 있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모르는 분들이 아기를 보며 웃어줄 때는 너무나도 고맙지만, 갑자기 다가와서 아기를 만지는 사람들을 보면 불쾌할때도 꽤 있다.


내가 동의한, 함께하고 싶은 공동체이냐, 주어진 공동체이냐에 따라 다른 것 같기도, 또는 그 선을 넘는 강도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 경험. 어쨌든 아기가 있는 한 이 낯설고도 익숙한 ‘우리’라는 말과 계속 부딪히며 살아가게 될 예정이다. 우리와, 나 개인이 편안하게 공존할 수 있으려나. 그 사이 어딘가에 균형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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