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SP의 임신과 출산 2: 출산후기

감각적 예민함과 트라우마 치료

by 까치

"임신 축하드립니다."라는 말을 들은 후 드라마에서만 보던 알 수 없는 초음파 사진까지 받으니 조금씩 임신임이 실감 났다. 애초 출산을 생각했을 때 HSP인 나로서는 질식분만은 전혀 할 염두가 안 났고 처음부터 제왕절개를 염두에 두고 임신을 결정했었다. HSP는 고통 임계치가 다른 사람들보다 낮아 같은 자극에도 더 고통스러워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하는 일이 시각적인 일이라 출산 과정에서 일어나는 피, 찢어짐, 절개 등을 직접적으로 보지 않아도 사실적으로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내는 탓에 처음부터 선택제왕+수면마취를 원했다. 특히나 중학교때 보었던 영화 '어웨이크'는 심장이식 수술을 하는 주인공에게 마취 중 의식과 통증이 깨어있는 공포를 다룬 영화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불안에 휩쓸려 있었다.


하지만 제왕절개 중 마취. 이 병원에선 내가 원하는 의료진, 분위기와 방식으로 분만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에 더욱 마음에 들었고 막달까지 열심히 다녔다. 태동검사, 막달검사, 빈혈수액 작고 여러 번의 이벤트를 지나 무사히 38주까지 왔다. 제왕절개 일정은 38주+에 잡았다. 원장님께서 최대한 맞춰주셨다.


수술 당일 3시간 정도 전에 출산 가방을 들고 내원. 외래는 5층이라 항상 5층으로 가다가 처음으로 7층으로 올라가니까 긴장이 많이 되었다. 코로나 테스트를 하고 입원실에 짐을 풀며 많은 서류를 작성했고 또 추가로 제대혈 기부를 하기로 해서 동의서도 썼다. 그 후엔 입원복으로 갈아입고 굵은 주삿바늘로 수액 연결. 굵은 주사 바늘을 손목에 처음 넣어보는 데 진짜 아픈 데다가 내가 손목을 잘못 움직이면 바늘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불안감에 휩쓸려 목까지 뻣뻣해졌다.


조금 더 기다리다 수술실이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대기를 조금 더 했는데 사실 이때부터 엄청 많이 쫄렸다. 다리를 덜덜 떨면서 기다렸다. 남편도 있으니 괜찮은 척 연기하다가 수술실에 들어가서는 머리와 입이 얼어버렸다. 말하는 것도 잊고 괜히 눈물도 그렁그렁하더니 척추마취할 때부턴 본격적으로 무서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옆으로 줄줄 흘르고 있었다. 수술실에 계신 분들이 따듯한 손으로 토닥토닥해 주시고 계속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말을 걸어주셔서 말을 하는 동안엔 잠시공포를 이겨낼 수 있었지만 대화가 끝나면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불안했다.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는지 나중에는 손까지 잡아주셨다.


연결해야 할 척추마취나 페인 버스터 등의 바늘을 꽂고 마취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도 있었는데 무서움과 혼란에 빠져서 이상한 소리 했다. '눈물이 자꾸 나요..', '마취가 안될까 봐 무서워요.' 이런 이상한 말들 해댔고, 말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새우등을 하고 척추에 주사를 맞으면 양쪽 균형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왼쪽이 더 차가워요, 오른쪽으로 더 가는 것 같아요 같은 말을 해야 했는데 무서워서 자꾸 등을 나도 모르게 펴다 보니 간호사 선생님들이 '등 구부리세요! 구부리세요!' 하는데 더 무서워지고 자꾸 등이 펴졌다. 이래저차 어쩔 수 없이 잡혀있는데 원장님이 들어오셔서 인사를 하셨다. '어젯밤 잠은 잘 주무셨어요?'

몇 달 동안 뵈었고 믿고 있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니까 그제야 긴장이 조금 스르륵 풀린 것 같다. 오시고 나선 산소마스크를 했는데 무거워 보이는 외관과 달리 마스크를 쓰니 생각보다 가볍고 상쾌한 공기들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느낌에 보이는 것과 다르네 이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좀 주무시고 계세요.'라는 말을 하셨다.


그리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의식이 깨어나자마자 몇 초 뒤 ”축하합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아빠가 들어와서 탯줄도 잘랐다는 말을 들었는데 비몽사몽인 상태여서 진짠가 그러고 있는 와중에 배 쪽에서는 꿰매는 느낌이 났지만 전혀 아프진 않았다. 이때부턴 무섭지도 않았던 게 마취 때문에 너무 졸려서 뭘 느끼고 그럴 정신이 없었던 듯하다. 그 뒤 조금 더 잤는지 어쨌는지 기억이 잘 나진 않는데 뒤처리가 끝난 후 수술실 문을 나와서 보호자를 만났다. 남편이 핸드폰으로 보여주는 아가 사진을 봤는데 수면마취를 해서 아기가 나올 때 못 봤기 때문에 더욱이 내 아가라니 믿기지가 않을 뿐. 난생처음 보는 아기가 내 뱃속에 있던 아기라니? 감동이라기보다 물음표에 가까웠던 이상한 기분과 빨리 보고 싶은 궁금함이 컸다.


아기랑 바로 모자 동실하고 싶었는데 아기가 일시적 과호흡이 있어서 산소치료를 해야 한다고 해서 치료실로 갔다. 출산은 했는데 만나보지도 못하고 입원실로 수술+ 소변줄을 차고 있던 상태라 걷지도 못하고 침대에서 남편 핸드폰 너머로 보는 아기라 더욱 출산 후라는 게 실감이 안 났달까. 그냥 수술한 사람 같았다. 그래도 수면마취 덕분에 두려워하던 수술을 순식간에 보내버리고 수술에 의한 새로운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기를 만나고 나서는 병원밥도 열심히 먹고 모유 수유도 열심히 도전해 보는 동안 무통, 페인 버스터로 고통을 많이 견뎌 내었다. 훗배앓이, 오로, 수술상처 부위 때문에 서는 것도, 앉는 것도 눕는 것도 너무 힘들었지만 병원에 계신 분들이 너무 친절하게 도와주셔서, 남편이 입원 기간 내내 함께 고생해 주어서 나름 잘 이겨내었다. 큰 사고 사건 없이 나와 아기 건강하게 퇴원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관계자분들 모두 너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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