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처럼 소재를 모으기
그림책 만들어볼래?
시작은 정말 단순했다. 내가 지금까지 그려온 그림책보다도, 내 홈페이지에 올린 그림책 습작에 더 큰 관심을 가져준 내 에이전트 알라이자(Aliza)는 한창 다음 그림책을 준비하던 내게 이런 제안을 했었다. '난 너의 사이트에 올려놓은 습작이 마음에 들어. 혹시 글/그림 작가로 활동할 생각은 없니?'
일러스트레이터로서 기반을 잡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은, 남의 글에 그림을 그려주는 일이다. 그건 한국이나 해외나 다 마찬가지이다! 출판사들은 좋은 글감을 늘 서랍 안에 놓아두고 있지만 적합한 그림작가를 찾지 못해서 출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늘 그런 외주 작업을 타깃 삼아서 그림으로 밥벌이를 해왔다. 일이 많을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고 들쭉날쭉 하지만, 그래도 늘 '남들만큼 잘 벌자'가 모토였던 만큼 꾸준히 경력을 유지해 왔음에 참 감사하다.
하지만 말이야...
그런 내게 직접 스토리를 만들어 보라니, 예상치 못한 제안에 기쁘기도 하지만 걱정도 되었다. 생각해 보면 학교를 졸업할 때부터 늘 내 꿈은 작가였다. 스토리도 만들고 그림도 그리고. 작가라면 진정으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지냈지만,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고 나서는 삽화, 그림책, 그림 외주가 나의 본업이 되어버렸고, 어느새 '나만의 이야기'라는 꿈은 저 멀리 먼지만 쌓인 채 방치되었다. 에이전트의 그 제안은, 내가 원했던, 하지만 끝내 잊어버렸던 어린 시절의 꿈을 다락방에서 다시 꺼내게 해 주었다!
그러나 스케치북 앞에서 그림작가로서가 아닌 글작가로서 다시 나를 마주 보았을 때, 너무나 낯선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 이야기를 어떻게 쓰더라? 그렇게 스토리보드를 고치고 또 고치고, n번째 재수정을 하고 있다. 이야기를 "그린다는"것은 참으로 복잡한 일이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게 맨땅에 또 헤딩하면서 여러 작법서나 작가들의 책들을 살펴봤다. 그중에 최근에 나온 책, 그림책 작가 최은영 님의 "그림책을 쓰고 싶은 당신에게"는 내게 정말 가뭄의 단비가 되었다. 굵지도 크지도 않은 이 작은 책에는 그림책, 특히 "그림책을 쓰다가 헤매는 작가들"을 위한 조언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있는 여러 조언들을 배경 삼아서, '좋은 그림책'을 만드는 방법이나 팁에 대해서 나도 좀 첨언하고 싶다. 나도 그간 생각한 바가 많아서 이다.
1. 대답은 늘 나 자신에게서
그림과 글, 그 차이
예를 들어, 난 엔간한 모든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모두 그릴 수가 있다. 이미 익혀 온 그림 스킬이 있기 때문에, 참고자료만 있다면 어렵지 않게 '그럴 듯'하게 묘사해서 '적당히' 잘 완성할 수 있다. 동물이나 식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림 실력은 어느 정도 연습과 노력으로 많이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안다. 여러 해외 그림책들 중에 한국 문화를 다룬 그림책이나 중고등 문학책들도 많이 있다. 그 그림책들의 대부분은 모두 어색하지 않게 잘 만들어졌다. 하지만 한국사람들은 알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이 그림들이 한국 사람이 그린 건지, 혹은 다른 나라의 작가가 그린건지.
한복의 경우 옷깃이 목을 잘 여미는지, 옷고름이 반대는 아닌지, 옷 주름이 양복처럼 그려졌는지... 이런 여러 요소들을 보면 단박에 이게 한국의 미를 잘 반영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 또 나의 경우엔, 한국 국적의 인물이 등장하거나 한국적인 요소가 들어가는 작품의 경우엔 더 몰입해서 그린다. 그 인물이 내가 아니라도 마치 나와 같기 때문이다.
나를 잘 보여주는 걸 찾자
이렇듯, '진정으로 내게 와닿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그것은 그림에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글 또한 마찬가지다. 한 번도 복싱이나 격투기 운동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복싱 선수에 대한 소설이나 만화를 그리는 건 정말 어렵다. 한 번도 발레나 리듬체조를 해본 적이 없는 내가, 발레리나에 대한 진심 어린 글을 쓰는 건 쉽지가 않다.
그렇듯, 글을 쓰고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나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내가 잘 아는 건 뭘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뭐지? 내가 좋아하고 반면 싫어하는 건 어떤 것일까? 어릴 적에 내 마음을 끌었던 추억은 뭐였지? 내가 가장 기뻤고, 반면 가장 실망스럽게 화가 난 어릴 적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림'은 어느 정도 그럴듯하게 넘길 수 있지만, 글이나 스토리는 철저하게 나를 해부하는 과정이다. 더군다나 내가 쓴 스토리에 그림까지 그리니, 정말 '나 다운' 무언가를 찾지 않고서는 이야기에 정을 붙이기 어렵다. 그래서 정말 나를 잘 표현하는 인물이나 소재가 무엇인지, 잘 찾고 잘 다듬는 과정이 중요한 것 같다. 다듬는 것도 시간이 걸린다. 너무 수정하면 본래의 의도와 너무나 달라지고, 최소한의 수정만 하면 너무 밋밋하고... 마치 점토 도자기를 다듬는 것 같다.
나를 둘러싼 여러 환경들, 사람들, 사건들을 잘 관찰하고 기록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의외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른다. 내 가족들, 나의 반려동물, 나의 이웃들을 잘 살펴보다 보면 나와 다르지만 결국은 비슷한 면면을 많이 찾아낼지도 모른다.
2. 옛날이야기를 Retelling 하기
생각보다 고전 동화를 Retelling, 즉 재해석해서 개작한 그림책이 많다. "종이봉투 공주"라고 하는 그림책에서는, 드래곤에 붙잡힌 한심한 왕자(?)를 달랑 종이봉투 한 장만 입고 구하러 가는 공주가 나온다. 늘 여자를 구하러 가는 왕자 이야기를 뒤바꾼 재미있는 작품이다. "늑대가 들려주는 아기돼지 삼 형제"는 똑같은 이야기를 늑대의 관점에서 풀어본 그림책이다. 같은 이야기지만 스토리를 말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전혀 다른 관점으로 작품을 볼 수 있다.
이런 고전의 재해석을 잘하는 회사는 역시 디즈니가 아닌가 싶다. 2017년 실사 영화 "미녀와 야수"에서 벨은 현재 트렌드에 맞게 이지적이고 독립적인 여자로 다시 재해석되었다. 백인 위주였던 옛날 1991년 애니메이션과는 다르게, 야수 주변에서 시중드는 하인들도 스패니시나 흑인 등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보함하고 있다. 미디어 업체가 백인계 인사들로 채워졌던 1990년대에는 감히 상상을 못 했던 변화이다.
미녀와 야수뿐만 아니라 "공주와 개구리(2009년)"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이다. 옛날 우화를 190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인물들을 흑인으로 바꿔서 전혀 다른 결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겨울왕국(2013)"도 주인공들을 다 여성으로 만들면서 좀 더 여성주의적인 시선으로 이야기를 바꿨다. 아, 이게 원래 눈의 여왕이라는 작품이었지? 싶을 정도로... 하지만 원래 작품의 주제, '진정한 사랑은 얼어붙은 마음을 녹인다'는 테마는 온전히 살려낸다.
우리나라의 여러 설화들도 이렇게 새롭게 재해석한다면 정말 재밌을 것 같다. 같은 이야기지만 인물의 성별이나 인종을 바꾼다던지, 시대나 배경을 바꾼다면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혹은 주인공이 아닌 주변 인물의 말을 빌려 이야기를 전달한다던지... 시간이 되면 이런 재해석을 바탕으로 다양한 습작을 하고 싶다.
3. 가장 중요한 것, 마음의 여유
내가 어릴 적 초등학생이었을 때, 여름방학이 되면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뒹굴거리는 게 제일 좋았다. 티비를 잘 보는 집안이 아니라서 티비도 안 봤고, 그때엔 컴퓨터도 스마트폰도 없었다. 놀 거라고는 혼자 인형놀이나 하거나 책을 보거나,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낮잠이나 자거나... 사는 게 단순했다. 그리고 어릴 적에는 그렇게도 시간이 느리게 갔다.
작품과 비즈니스로서의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