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공직에 사표를 내던 때에 곧바로 이어서, 나는 전업 주부에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전업 가장이 되었다. 내가 가장의 바통을 이어받아야 우리 가정이 난파선처럼 되지 않을 터였다.
그때는 영어 교육이 한창 열풍을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특히 학습지나 파닉스 영어 교육이 대세였다. 이것저것을 꼼꼼하게 따지면서 생각해보던 중에 영어 공부방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아이들을 그룹별로 모아서 영어 학습을 하는 방식이었다. 그 학습법이 매력적인 것은, 기존의 주입식 영어 학습 방식이 아니라 비디오를 통하여 영어 노래를 배우고 단어 카드 등을 활용하여 게임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었다. 게다가 원어민이 공부방에 출강한다는 것은 금상첨화였다. 내가 영어 공부방을 개설하자마자 공부방 회원들이 미어터질 정도로 밀려왔다. 약간 먼 곳에서는 그룹을 만들어 놓고 출강을 요청해왔다, 내가 운영하는 영어 공부방에 들어오려면 몇 년은 대기하여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나는 최우수 영어공부방 운영자로 상을 받기도 했다. 어린이 영어공부방 운영을 10년간 했다. 덕택에 우리 가정의 가장 바통 체인지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개척교회
남편이 5년간 신학생 생활을 끝냈을 때 우리는 곧바로 교회를 개척했다. 당연히 그러는 것인 줄 알았다. 부교역자 생활을 하거나 특수 목회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남편은 신학생이었을 때 수석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했던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곤 했다. 한 가정의 가장 노릇을 못하니 장학금을 받아서 가계에 보탬이 되려고 그랬단다. 남편은, 1등 하는 것을 포기하고 차라리 목회를 준비하고 유익한 서적을 읽었어야 했다며 뒤늦게 아쉬워했다.
대형교회에서 분립 개척을 한 것도 아니고 후원자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우리는 맨땅에 헤딩하듯이 개척교회 목회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주일 예배, 오후 예배, 수요 예배, 금요일 철야 예배, 새벽 기도회, 구역예배 등등 기존 교회에서 답습했던 그대로 교회 시스템을 운영했다. 모터는 부족한데 험한 바다를 항해하려는 작은 배처럼 매사에 힘이 들고 역부족을 느꼈다.
영어 교사로 발령받다
개척 5년 후에, 나는 영어 부전공 연수를 받아서 영어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학교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겠다는 거창한 꿈을 안고 교직에 섰다. 영어공부방을 운영하던 것에서 학교 교사를 하면서 가정의 가장이라는 바통을 꼭 붙들었다.
교사 발령을 받은 지 7년 되던 해에 아들이 사고를 당했다. 그날부터 우리 가정은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가슴에 한이 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ㅇㅇㅇ 목사는 아들을 사고로 잃었는데도 일단 시신을 그대로 두고 주일 강단에서 설교를 했다"더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아들을 접어두고 목회에만 전념하라는 식의 조언이었다.
과연 신앙이란 무엇일까? 그런 분은 신앙이 좋은 것이고, 아들이 하루아침에 죽은 자와 같이 되었을 때, 3번이나 정신을 잃고, 한동안 밤낮없이 눈물을 흘렸던 목회자는 신앙이 약하다고 낙인 하는 투의 말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ㅇㅇㅇ이라는 목사님과 같은 분들에 비하면 남편은 참 여리고 인간적인 목회자였다.
"목사님, 저희 걱정은 마세요. 안정되면 우리 교회에서 모여서 다시 예배드리도록 해요. 일이 수습될 때까지 매주 올라오시는 일은 하지 말아 주세요."
집사님들이 그렇게 당부했다.
6개월 만에, 아들을 서울 병원으로 옮겨왔고 아들 사고 이후에 처음으로, 나는 우리 교회 성도들과 대면했다. 예배당을 처분했고 사택의 거실에서 예배를 드렸다. 거실에는 아들의 짐을 정리한 대형 택배 박스가 가득했다. 그 택배 박스가 강대상이 되었고 미카엘 반주기로 찬양을 하며 예배를 드렸다. 아, 그런 환경에서 드리는 예배에서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모른다. 당시의 나의 상태는 공황 그 자체였다. 영화를 볼 수도 없었고 TV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책을 읽어도 집중이 되지 않았고 누군가의 위로마저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매주, 누추한 강대상을 통하여 들려오는 무미건조한 (웃기지도 않고 말솜씨도 없어서) 설교 말씀을 듣고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거실 예배는 6년간 계속되었다. 그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견뎠느냐고 묻는다면 매주일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듣고 살 힘을 얻었노라고 말할 수 있다. 성도들은 묵묵히 거실 예배에 참석했다. 매주 예배 후에, 배달 음식으로 애찬을 나누었다. 그 시간이 끝나면 우리 부부는 곧장 병원으로 가서 아들의 재활치료 운동을 시켰다.
비대면 예배
코로나가 불어 닥쳐서 거실 예배마저 불가능해져서 온라인 예배를 2년간 드렸다. 그 예배의 장점은, 원거리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함께 동참할 수 있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거나 사정상 교회에 나가지 못하고 있는 몇 가정이 온라인 예배에 참석했다. 온라인 예배의 장점은 또 있었다. 강의식 설교에서는 활용하지 않았던 다양한 사진이나 영상을 가미하니 이해가 훨씬 잘 된다는 것이었다.
대면/비대면 이원 쌍방향 예배
2022년부터 방역 수칙이 완화되어 마침내 예배당에서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물론 온라인 예배도 겸했다. 그러므로 대면/비대면 이원 쌍방 예배를 드리고 있다.
남편은 교회 부흥에 관심이 1도 없어 보인다. 남편은 부흥하는 교회의 목사님들과는 다른 색깔로 설교를 한다. 아들을 병상에 올려둔 아비는, 그냥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무익한 종으로 남고 싶은 모양이다. 기복 신앙을 말하지 않으며 신비주의도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성경 속에 드러난 하나님만 성도들에게 보여주고 자신은 어디론가 숨어서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교회는 미자립 상태이고 나는 여전히 물려받은 가장의 바통을 남편에게로 돌려주지 않았다. 누가 가장이면 어떠한가? 우리 가족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인생 경주를 경주했다. 한 손에는 자기 몫의 바통을 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