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우리 부부는 서서히 긴장된다. 투병 중인 아들이 연례행사처럼위루관 교체 시술을 하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아들은 한순간의 사고로 중증환자가 되었다. 11년째 목숨만 붙어있을 뿐이다.
푹푹 찌는 듯한 더위도 한 풀꺾였다. 그 전날 비가 잔뜩 내렸다. 비 개인 다음 날의 하늘이라 눈이 시릴 정도였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푸르른 날이었다. 그다음 날도 비 예보가 있었다. 병원 가는 날만 맑았다. 날씨는 일단 끝내줬다.
시술 전날 저녁 식사 이후부터 아들의 단식이 시작됐다.
아들은 환자용 경구식으로 식사를 대신해 오고 있다. 와상 환자는 식사를 최소한으로 조절하지 않으면 비만이 오기 쉽다.그래서 한 끼에 400ml의 식사만 한다. 한마디로 우리가 마시는 우유 500ml 한팩 보다 적은 양으로 한끼를 때우는 셈이다. 그것도 풀 죽 같은 환자용 유동식으로만...
배 고프다고 보채는 자식을 바라만 보는 일은 부모로서는 할 짓이 못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들이지만 그는 배고프다는 의사 표현을 한다. 배가 고프면 몸을 비틀고 괜히 하품을 연거푸 해댄다. 그러다가 입을 쩝쩝거린다.
자기가 정신이 온전했더라면 자신의 그런 모습이 얼마나 싫을까? 자신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나는 근무 중이라 병원에 동행하지 못하고마음만 동동거렸다.
교사는 자리를 비우는 것이 쉽지 않다. 교사가 빠진 자리는 다른 사람이 대체해야 한다. 그래서 연가를 낸 적이 거의 없다. 지참이나 조퇴를 하더라도 당일 수업 시간표를 조정해야한다. 그것도 누군가에게는 민폐를 끼치는 일이다. 수업 교환을 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덜 미안하겠지만 1~2 주간 동안 수업 폭탄을 맞게 된다. 그것도 못할 짓이다.
매년 한 번씩 하는 위루관 교체 시술이지만 올해는 유난히 더 마음이 쓰였다.
남편이 일주일 전에 코로나에 확진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은자기 몸을 가누기도 쉽지 않을 판이었다. 그런데아들의 시술하러 가는일을 감당해야 했다. 물론 활동지원사가 동행하지만 중요한 사무 처리 등은 남편의 몫이었다.
중증환자가 외출하려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챙길 것이 많다.
남편은혼자 구급차를 부르고 아들을 챙겨 병원으로 가야 했다.
남편은 맘이 참 약하다. 축구 경기 중 A매치는떨려서 못 보는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혼자서 병원 접수 수속을하고 수술실에 아들을 들여보내는 일은 하자면 맘도 몸도 지칠 일이었다.
그런데 출발하려는 그 아침에 일이 터졌다.
원래 사설 구급차는 이틀전에 예약하는 것이었다. 미리 예약을 해두었던 사설구급차가 당일 아침에 노쇼 했단다.시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콜 택시는 대기 번호가 너무 길어 거의 이용하지 않는 편이다.
'아, 얼마나 애간장이 탔을까?'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그런다고 별 수도 없겠지만... 마음이 참 서글펐다.
119에 연락도 해 보고 (응급환자는 가능하나 시술하러 가는 환자는 이용할 수 없다고 함) 혼자서 난감한 상황을 헤쳐 나가는 동안 남편의 속이 새까맣게 탔다고 했다. 아들은 구급차에 실을 수 있게 다 채비를 해둔 상태였고 병원에서는 의료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어찌어찌 수습하여 아들을 실은 구급차는 병원에 도착했단다. 이런 불상사를 겪고 보니 하루 전날 예약 상황을 미리 체크해 보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예약 확인 문자까지 받아둔 상태라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을 예상치 못했다.
고스란히 남편 혼자 중증환자 아들을 챙기고 시술을 끝냈다.
매년 시술을 끝낸 아들이 집에 도착하면 심하게 구토를 했다.
[수면 내시경으로 시술을 하지 않으면 턱이 빠졌다. 빠진 턱을 고정시키고 있다.]
아마 수면 내시경으로 시술할 때 투여한 수면제 때문일 듯했다.
그렇다고 수면 마취를 하지 않고 시술을 하면 의료진이 진땀을 빼야 했다.
입을 벌려 마우스 피스를 끼우고 뱃줄을 삽입한다. 그럴 때 아들이 입을 앙다물고 있어서 의료진이 입을 벌리려고 하는 과정에서 턱이 빠졌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매번 수면 마취를 하고 시술을 한다.
시술을 마친 담당 의사는,
"오늘 오후부터 식사 가능해요."
라고 했지만 아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해는 시술 후 다음 날 아침까지 아무것도 먹이지 않았다. 맘은 아프지만 그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랬더니 아들이 고비를 잘 넘겼다.모두가 조마조마했었다.
"비자발적 단식이네."
"맘 아파도 큰 난리 치는 것보다 나아."
우리는 배고파 몸부림치는 아들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지만 토하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시술 후, 영양제 투여하는 시간이 4시간 정도 걸린다. 그 주사를 다 맞은 후 집으로 돌아올 때는 장애인 콜 택시를 이용한다. 병원이 소재한 그 지자체의 장애인 콜 택시는 대기를 거의 하지 않아도 됐다. 게다가 휠체어를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오후 파트의 활동자원사가 아들의 휠체어를 싣고 병원으로 오곤 했다. 그러면 아들을 휠체어에 앉힌 후 장애인 콜 택시에 싣고 올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 아들이 멀미를 덜 할 것 같았다. 그러면 구토를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사설 구급차는 침대에 눕혀서 이동하지만 장애인 콜 택시는 휠체어를 실을 수 있는 장치가 되어있다.)
퇴근해서 보니 아들은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미열이 좀 있어서 얼음 팩으로 열을 식혀 주었다. 그리고 아들이 있는 본가에서 나왔다.
"큰 일 났어요.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토했어요."
세컨 하우스에 도착하여 막 앉으려는 순간, 활동지원사에게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 열을 내릴 겸 물 한 모금을 먹였는데 토했다는 것이다.
서둘러 아들에게로 갔다. 도착하니 아들이 몇 번 토했다. 인지 없는 환자가 토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기도로 이물질이 넘어가면 큰 일이다. 활동지원사는 쉼 없이 석션하여 목관에 있는 토사물 찌꺼기를 뽑아냈다.
일어나지 말았으면 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급히 아들의 고개를 옆으로 젖혀 충분히 토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속옷, 겉옷은 물론이거니와 베개며 패드가 다 젖었다. 침대 커버까지 버렸다.대략 난감한 일이 눈앞에 벌어졌다.
'정신을 차리자!'
'이 전쟁 같은 상황을 어디서부터 해결해 나가지?'
아들이 어느 정도 안정되는 듯하여 옷을 벗기고 온몸을 닦아 주었다.
중증 환자의 옷을 벗기고 입히는 일은 전문가 수준이어야 가능하다. 패드와 시트를 갈았다. 옷도 새로 입혔다. 걷어내고 벗기는 동안에 활동지원사와 나는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큰일은 수습이 됐지만 뒷 처리는 답이 없을 정도였다.
먼저 오물을 닦아낸 것들을 애벌빨래했다. 그런 후에 세탁기에 돌려야 했다. 두 개의 세탁기를 동시에 두 번 돌렸다.그런 후에 건조기로 빨래를 말렸다.
저녁 먹는 것을 깜빡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사람이 난리를 만나면 배도 고프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들의 위루관 시술 때마다 우리는 십 년 감수한다. 또 1년 후에 이 난리 블루스를 치를 생각에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고생한 남편에게는 와인 색 넥타이를 선물했다. 우울한 기분을 날려버리라는 의미였다. 오후 파트에 휠체어를 싣고 달려왔던 활동 지원사에게는 수고비를 챙겨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