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어릴 적 교회
어린 시절 출석했던 교회 이야기를 조금 할게요. 역사가 90년이 넘는 시골 교회입니다. 저희집이 그 동네로 이사간 것이 제가 중학교 입학한 이후이니 실질적으로 그 시골 교회를 다닌 기간은 길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 기억에 오래 남아 있는 까닭은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께서 모두 소천하실 때까지 출석하셨던 교회여서겠죠.
유난히 또렷히 남아 있는 기억은 예배 시작 시각이 될 때마다 울리던 교회종소리와 크리스마스 새벽에 교회 학생부 아이들이 집집마다 방문하여 불러주던 캐럴입니다. 제가 마을을 떠난 것이 대학교를 입학하면서이니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해마다 크리스마스 날이면 새벽노래는 축복처럼 들었네요.
상경한 이후의 크리스마스는, 흥청거리는 연말 분위기에 뒤섞인 상점마다 울려퍼지는 캐럴소리로 기억이 됩니다. 성탄의 의미는 사라지고 상업적인 목적과 사람들마다 한 해를 보내며 느끼는 다소 쓸쓸하고도 내일을 잊은 듯한, 방종으로 흐르기 쉬운 자유로움이 있었네요. 개인적으로 저는 성탄절마다 밀린 빨래를 해치우곤 했습니다. 쉬는 날이어서 수업이 없었고 별다른 약속도 없는 학생이었기에 거룩함을 떠올리기보다는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심정이었죠.
대학시절 방학때 잠시 집에 다니러 와보니 교회 종소리도, 크리스마스 새벽노래도 모두 없어졌다 하더군요. 세상은 변해가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정서도 달라져가니 변화에 대해 무어라 섣불리 말을 하긴 어렵지만, 제게는 나름 낭만이 있었던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구나, 하는 그 정도의 느낌이었네요.
아무튼 고향을 떠나 겁도 없이 뛰어들었던 서울살이는 매사 좌충우돌이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치기어린 그 시절의 실수나 실패도 모두 소중하지만 그 때는 어디엔가 부딪힐 때마다 부서질 듯 아파했었네요.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도 떠난 것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거든요. 오히려 잘한 결정이었다 생각되어요. 자신의 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보아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보이고 그 자리의 의미도 알게 되는게 이치니까요.
그런데요, 고향에 대한 애착이 조금도 없다 생각했었는데 타향살이를 하면서 자신도 해석이 안되는 그리움을 문득, 느끼는 순간들이 있더군요. 그런 때에 불현듯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들리는 것이 교회 종소리와 성탄절 새벽노래였어요.
몇십 년의 타향살이를 접고 코로나가 창궐하던 2020년 봄에 저는 귀향을 단행했습니다. 떠날 때에 비해 많이 늘어난 짐을 트럭 하나에 싣고 홀연 돌아왔습니다. 다시 이곳으로 온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 이유들 중에는 합리적인 것들도 있지만 지금 거듭 생각해봐도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어요.
서울에 사는 내내 제 마음속에서 들리던 새벽노래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아니면 단순한 향수의 일종이었을까요? ...
고향집에 돌아와서 예배가 없는 날에 교회 마당에 혼자 가보았어요. 봄날이라 꽃나무에 전등을 켠듯 환하게 꽃들이 피어 있었고 벌들은 윙윙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고 있었어요.
교회 종탑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금방이라도 종소리가 머리 위로 쏟아질 듯한 착각이 들었고, 교회 마당 어디에선가 아버지께서 제 이름을 부르시며 나타나실 것만 같았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익숙했던 비교적 젊으신 아버지 모습으로 말이예요.
3년 전에 어머니께서 소천하신 것을 끝으로 집안 어른은 모두 떠나셨고 고향을 지킬 자식은 없었기에 고향집은 먼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더는 교회가 있는 그 시골마을에 갈 일이 없어졌구요. 오고 또 가는 것이 인생이겠지만 사람의 마음속에는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있기에, 저는 마침내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새벽 어둠속 저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노래소리에 이끌리듯 저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지금 이렇게 오직 한분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본향을 향하여 가는 길 위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문장은, 기형도 시인의 <우리 동네 목사님>이라는 시의 한 구절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