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 혈연 중심 사회
어린 시절, 나는 이방인이었다. 세 살 때부터 동네에서 자랐어도 그건 바뀌지 않는 사실이었다. 비단 부모님이 농사를 짓지 않아서만은 아니었다. 대대로 물려받은 땅도, 우리의 조상도 이 곳에 없었기에 우리 가족은 항상 마을 속에서 완전히 섞이지 않고 다른 부류로 취급되었다. 우리 중 가장 마을과 동떨어져 있던 건 아빠였다. 아빠가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게 온전히 아빠의 의도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나는 동네 애들과 종종 어울려 놀았지만, 날 대하는 그 애들 부모님의 시선에는 약간의 조심스러움 같은 게 섞여 있었다.
그맘때 나는 베스트셀러였던 조선왕조실록 책을 심심할 때마다 펼쳐서 왕실 족보가 그려진 페이지를 보는 걸 좋아했다.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끼리 어떻게 얽히고 촌수가 어떻게 되는지가 그렇게 흥미로웠다. 어릴 적 살던 동네 근처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성씨로 나뉘었는데, 내 동네 친구들도 대체로 그 성씨에 속했다. 그러니까 마주치는 마을 어른들은 사돈의 팔촌도 아니고 진짜로 7촌쯤 될 수도 있는 거였다. 만일 그러라고 한다면 그들에게도 계보도를 그려줄 수 있을 터였다. 나에게도 부모님과 조부모님이 계시거늘, 내가 그 성씨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뿌리 없이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우리 가족이 이 곳의 계보도 속 그 어디에도 속할 수가 없어서 나는 쓸쓸했다.
대학 진학 후, 이사 온 마을에서도 양상은 비슷했다. 못 보던 젊은 애가 동네를 돌아다니면 어르신들은 어느 집 자식인지 궁금해하기 마련이다. 아버지가 뉘시냐 묻기에 무심코 사실대로 말씀드렸더니 갸우뚱하신다. 이 동네 성씨가 아닌데? 하는 눈빛. 아차, 어머니 성함을 말씀드리면서 부연설명을 한다. 저어기 뭐 하는 집 딸이에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신다.
출생신고지에 따라 부여받은 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에도 불구하고, 영영 이방인으로 남을 것 같았던 나의 인생은 결혼으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00면 00마을 김씨 집안의 아들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
결혼 후 첫 명절에 나는 큰집에 들렀다가 또 마을에서 제일가는 어르신 댁에도 찾아뵈었다. 온 마을의 김 씨들이 다 모여 절을 하는 광경은 실로 진풍경이었다. 그다음 차례로는 마을 바로 뒤의 선산에 가 성묘를 했다. 내게 성묘란 국도변 외딴 산기슭에서 하는 것이었는데,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선산이라니. 그때 나는 내가 이 집안 며느리로서 이 지역 계보도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게 되었음을 실감했다.
태어난 지 근 30년 만에 비로소 이 지역 사람이 된 것이다.
Photo by Eilis Garvey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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