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이야기
길을 가다가, 일을 하다가, 혹은 잠에 들기 직전이라도 어떤 문구가 떠오르면 메모장에 적는 습관이 있다. 핸드폰 메모장 제일 위에 고정되어 있는 폴더의 제목은 ‘절대로 쓰지 않을 이야기.’ 비밀번호까지 걸려있는 이 폴더는 여러 번 읽고 퇴고하며 정돈한 글도 많지만 쭉 내리다 보면 ‘오징어볶음’ 같이 엉터리 문구들도 꽤 있다. ‘오징어볶음’은 오징어볶음이 먹고 싶던 날 한식당에 찾아갔는데 마침 오징어가 다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실망해서 적어둔 문구다. ‘동그라미를 보고 동그라미라고 답하는 것.’은 세상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싶은 마음에 적어 두었고, 그 외에도 가끔은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습니다.’, ‘살아가는 가치가 뭐냐는 물음에 행복이라 답했다.’ 등등 절대로 쓰지 않을 이야기 중 상당수는 이미 글로 적어두었지만 한참 전에 적어둔 문구라도 아직까지 단어로만 적혀있는 것들도 많다.
언제 적었는지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대략 스페인어를 처음 배울 때 적어뒀던 말이 보인다. ‘Vale la pena : 가치가 있다 혹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표현인데 처음 스페인어를 배우고 가장 좋아했던 말이다. 좋아했던 이유는 글쎄. 나는 살아가면서 찍는 모든 점들은 결국 서로 이어지며, 세상 모든 일에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던 시절 성적까지 부진했던 시절 전공을 선택할 때 그럴 거면 차라리 취업 잘 되는 전기과를 가라는 아빠의 조언에 덜컥 전기과를 선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건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에 전공 시간에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멕시코로 취업을 준비했다. 현지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며 취업을 준비하는 데 다시 7개월이 걸렸다. 마침내 취업한 회사에 붙은 이유는 스페인어를 잘해서가 아닌, 내가 그토록 쓸모없다 생각했던 전기과를 전공해서였다. 국제무역사와 원산지 관리사를 취득하며 배웠던 인코텀스, HS 코드 등 무역 지식도 물류 회사를 들어가진 않았지만 일을 하며 꽤나 유용하게 쓰였고, 군대에서 3km 달리기를 중간에 포기하고 평소 나보다 체력이 좋지 않던 동기 후임이 끝까지 도는 걸앉아서 지켜볼 때 느꼈던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과 상실감은 멕시코 회사에서 3년을 넘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주었다.
살면서 해외여행 한 번 안 가봤던 내가 해외에서 회사를 다니며 겪은 경험은 조금씩 쌓여, 이내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었고, 통역을 겸하며 는 스페인어는 세계여행을 시작하며 남미 어느 국가를 가더라도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게 해주었다. 회사를 다니며 시간을 쪼개 사진을 찍고, 보정하고, 인스타에 올리고, 영상을 찍고, 편집하고, 유튜브 업로드를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적고, 블로그와 브런치에 게시하는 일들은 점점 쌓이고 쌓여 내년부터 시작할 1인 사업, 영국에서 스냅 사진을 할 당시 든든한 내 편이 되어줄 자산이 될 예정이다. 살아가면서 찍는 점들이 모여 언젠가 별자리가 된다는 걸 믿다 보니 나는 나만의 점을 찍고, 그들은 그들만의 점을 찍으며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늘 아래 같은 별자리가 없듯, 남들이 이렇게 산다고 해서 서로 비교하는 세상에 맞춰가며 살 필요는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매일 새로운 곳에 점을 찍고 하루하루가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여행을 하며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나를 기록하는 순간. 멕시코에서의 오랜 생활, 과테말라 아카테낭고에서의 보람, 시위로 모든 게 폐쇄된 페루에서의 고난. 기록은 얼마나 시간이 흐르더라도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해준다. 기록하는 여행은 앞으로 내 인생에 가장 큰 가치로 남을 것이다. 여행은 사치라기보단 가치 있는 일, 머릿속 상상이 마음속회상으로 변하는 시간. 그곳에는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그곳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있으며, 그곳만의 문화, 그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절대적 가치가 분명히 있다. 떠나기 전엔 절대로 알 수 없다. 스스로의 가치와 경험의 가치는 본인이 직접 만드는 것이기에 Vale la pena라 말한다. 이제는 그동안 살아온 경험으로 확신하며 살아가는. 세상 모든 일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