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 회복법

by 피연

지난 3주는 절망의 날들이었다. 29살, 아직도 학부생, 1천만원을 학비로 내고 마무리도 못하며 다른 길을 새로 뚫어야만 하고, 주변에 내 또래는 거의 없어 외로운 상황은 너무 잔인했다. 내 길이라고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 수포로 돌아간 게 제일 슬펐다.


이상하게 어제부터 책이 읽혔다. 불과 한 나절 전만 해도 정말 책만 펴면 아무 것도 안 보여서 이젠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도피하듯 소설책을 읽었는데. 희한하지, 낭떠러지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트램펄린이었나, 다시 반동이 생겨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다른 건 몰라도 미래의 내 생각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하기로 한 건 끝까지 가자.


어떻게 회복된 건지 나름대로 생각해보니.

노력해도 안된다는 절망감과 잠만 오는 몸이 제일 힘들었는데,

1. 수업 가기 싫으면 안 가고, 자고 싶으면 자고, 공부하기 싫으면 안 함. 하고 싶은 대로 함. (아무리 이래도 회복 안될 줄 알았음) 맛있는 거 먹고 싶은 거 사먹고, 카페 원없이 감.

2. 주변에 말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길게 가짐 (창피해서 말하기도 싫었음)

3. 책을 읽고 서점을 감. 글을 씀.

4. 철저히 내 스스로의 판단으로 그만둬도 괜찮다고 결단 내림.

5. B안으로 생각한 활동을 시작하려고 구체적으로 준비함 (강의도 결제해버림)

6. 내가 스스로 생각한 결정을 주변에 말하기 시작 - 용기 내서 힘들다고 말하고 솔직한 고민을 털어놓음. (이거 선택해줘, 어떡할까?(X), 이런 고민이 있어서 그냥 그렇더라. 나는 이 쪽이 나을 것 같아 (O))

7. 몸이 회복되고 스트레스가 가라앉음(갑자기 났던 여드름이 사라짐, 늦잠을 덜 자게 됨)

8. 포기한다고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앉아서 다시 시도

9. 잘됨ㅋ 회복


다행히 아직도 시간이 남았다. 조금 빠듯하지만 아주 포기할 정도는 아니다.

가르치려고 시작했으니 다시 해보자.


기억하고 싶어서 조금만 더 써보자면,

회복 직전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젠 정말 수학은 나와 안 맞다고. 노력해도 발버둥쳐도 도망가더라고 스스로 인정하며 책장에서 모든 수학 관련 책을 뽑았다. 정수론, 현대대수, 수학사, 해석학 원서, 갈루아 이론... 이젠 다 버리거나 나눠줘야지. 문제집도 다 꺼내서 쌓아두는데 눈물이 났다. 조금씩 알 것 같다며 밝게 웃던 내가 생각나서. 그럼에도 거의 다 와서 그만두고 없던 시간이 되어버린다는 게 서러웠다. 늘 자리가 없던 책장에 공간이 텅 비어서 책들이 자꾸 쓰러졌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쌓아두고 잠에 들었다. 다음날, 관성처럼 수업을 내리 빠지고 이젠 끝이구나. 노트북 파일을 괜히 켰다 껐다하며 강의안을 펼쳤다. 한 번만 읽어볼까, 맨 앞장으로 돌아갔다. 한 줄씩 읽어보니 읽혔다. 그렇게 쭉 읽었다. 무언가 끝났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결국 휴식이 필요했구나. 큰 결정을 잘못 내리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주변의 따뜻한 말들에 너무 감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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