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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애수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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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싸라기 Apr 28. 2024

애 수

3화

은정이 전해 들은 이야기에 상상을 더해본 10년 전 12월의 어느 날.


어느덧 저릿저릿 해진 겨울바람과 제멋대로 흐느적거리듯이 보이지만 제법 차분하게 내리는 눈송이가 있는 초저녁 영등포 밤거리. 연말연시 시즌이라 사람들은 각자 즐거운 마음과 흥분된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만일 모르는 사람이라도 서로 마주친다면 그 즉시 하이파이브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들뜬 분위기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찬혁 혼자만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굳어있는 얼굴로 전봇대 옆에서 연신 담배를 뿜어댄다. 땅바닥 주변에는 이미 세 개의 담배꽁초가 뒹굴고 있었다. 무지개무늬가 수놓아진 머플러와 허리띠를 다부지게 맨 검은색 모직 트렌치코트 그리고 블랙진에 검은색 웨스턴 부츠를 신고 있는 찬혁. 거기다가 장발이라고 하기엔 어정쩡한 길이의 뒷머리를 조랑말 꽁지처럼 묶은 모습은 누가 봐도 음악 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외모였다.

보통 그런 모습이라면 여자들이 질색팔색을 할 그런 패션이었으나, 주변 지인들의 말을 빌리자면 그다지 혐오스러울 정도는 아니라는 평을 들을 정도의 준수한 외모다.

그렇게 담배를 피워대도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않자 찬혁의 굳어있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도대체... 참 내.”

피우던 담배를 부츠의 뒷굽으로 짓이기고 있을 때쯤 저 멀리 종종걸음으로 뛰는 시늉만 하면서 다가오는 친구를 발견한다. 이 친구 이름은 김 기명. 두 사람은 사회에서 만나서 그 기간이 얼마 되지 않은 친구지만 시원시원한 성격과 가끔 돌발적인 우스꽝스러운 행동 때문에 금세 친구가 돼버린 그런 녀석이다. 활어 도매상에서 활어회 운반차를 몰고 다니고, 사교댄스를 좋아하지만 외모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아니 오히려 자기 멋대로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는 독특한 친구다. 오늘도 일하다 막 뛰어나왔는지 고무장화와 머리에는 피에로를 연상시키는 두건을 두르고, 수염은 깍지 않은 채로 나온 것이다. 

“너 이 자식아 지금 시간이 몇 시야!”

찬혁의 다그침에 다가오던 기명이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한다.

“아 미안 미안... 오늘 따라서 차가 엄청 밀리네. 연말이잖냐.”

“미친놈 지랄하네. 얼마 전 음주운전 걸려서 운전도 못하는 놈이...”

“야 대중교통은 안 밀리냐?”

“그걸 뻔히 알면서 버스를 타는 건 뭐냐고. 전철은 파업한다던?”

계속해서 다그치던 찬혁을 기명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한다.

“어? 어? 그래서 나 그냥 가? 그냥 간다?”

“아 그런데 이 새끼가 죽으려고 작정을 했네. 한번 가봐 어떻게 되나! 이걸 그냥 콱!”

“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짜식 쫄긴. 야 담배나 하나 줘봐 봐.”

찬혁이 째려보면서 마지못해서 담배를 건네자 기명이가 또 한 번 장난스럽게 능청을 떤다.

“오... 그런데 오늘 뭐냐... 빠숀 이 심상찮은데. 흐흐.”

“야 지랄 말고 어서 가자. 추워 디 지겠다.”

“오케이 오케이. 짜식 몸이 달았구만.흐흐.”

“지랄.”

“야 어쨌든 오늘 잘해보라고... 너의 운명의 여인이 오늘 그녀일지 누가 아냐. 응? 잘되면 알지?”

“으이구 내일 모래면 나이 오십에 무일푼 딴따라를 누가 좋아한다고. 내가 여자라도 도망가겠구만...됐어.”

“그런 놈이 이렇게 차려입으셨어?”

“그런데 이 자식이 오늘 자꾸 매를 버네.. 너 이리 좀 와봐.”

찬혁이 기명이를 잡으려고 두 팔을 뻗자, 기명이는 재빨리 몸을 뒤로 뺀다.

“야 그래도 너 정도면 먹어 주잖아. 남자인 내가 봐도 뭐... 게다가 너를 누가 마흔 후반으로 보겠냐. 내 말을 믿으라고.” 

찬혁은 내심 듣기는 좋았으나, 현실적으로 많이 부족한 자신의 형편 때문에 그다지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자 이쪽으로 가시죠. 락커님.”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로 목적지를 안내하는 기명이를 찬혁은 오른팔로 기명이의 목을 휘감았고, 이내 둘은 어깨동무를 하며 흥겨운 분위기의 많은 사람들 속으로 걸어갔다.

 

찬혁은 지나치는 사람들의 대화하는 모습만 봐도 기분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행복이라고 생각하자 얼굴에는 그늘이 생겼다.

가족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이야기하며 지나가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 위해 계획을 말하며 지나가는 사람. 스쳐 지나가는 많은 대화들 중에 유달리 두 가지 단어만 찬혁의 귓가에 크게 들린다.

‘가족’ ‘연인’

찬혁은 아버지가 식도암으로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어 신용불량으로 삼십 대를 다 보내고 가까스로 신용 회복을 하고 나니 지금 이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히 시기를 놓치고 제대로 된 연애나 데이트를 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 자랑스럽게 떠벌릴 만한 일도 아닌 것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친구 겸 애인이 되어버린 자신과 함께한 베이스 기타와 락 음악이 유일한 친구였고, 신나는 데이트였던 것이다. 그렇게 외롭게 중년을 맞이한 찬혁에게 친구인 기명이가 오늘 좋은 자리를 마련해 준다고 해서 오랜만의 설렘 반 기대 반으로 외출을 하게 된 것이다. 

 

주점이 있는 골목은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오색 불빛과 소음에 가까울 정도의 흥겨운 음악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상기된 표정과 어우러져 마치 페스티벌이 열린듯한 분위기였다. 두 사람은 오고 가는 많은 인파 속을 간신히 헤집고 어느 참치 횟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자 여기다.”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고 의기양양한 포즈를 취하며 기명이가 웃음을 보이자 찬혁은 얼떨떨한 표정이다.

“야 이 추운 겨울에 무슨 참치 회냐?”

찬혁의 반응에 기명이가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다.

“아놔 이 사람이 또 또 모르는 소리 하네. 회는 참치지... 넌 지금 겨울에 아이스크림 먹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거라고.”

“지가 처먹고 싶으니까 여기로 정한 거면서.”

찬혁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째려보며 받아치자 기명이가 큰소리로 웃는다.

“하하하 들켰네. 귀신같은 놈. 여기 맛집이야 서비스도 기가 맥힌다구. 한번 믿어봐라.”

“얼린 회는 별론데... 야 맛없으면 니가 돈 다 내라 알았어?”

“오케이! 자 들어가자.”

기명이가 당당하게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찬혁은 기명이의 뽀작뽀작 소리가 나는 고무장화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한편으론 웃기기도 했다. 그런 장화를 쳐다보며 그의 뒤를 쫓아 들어가며 가게를 휘 둘러본다.

“음 가게 분위기는 꽤 그럴듯하네. 그렇게 싼 티 나지도 않고.”

“그치 그치? 내가 오늘을 위해서 아니 너를 위해서 먼저 답사까지 했다는 거 아니냐.”

“그래 그건 잘했네.”

예약확인을 마치고 종업원의 안내를 따라서 정갈하게 세팅을 해놓은 룸으로 들어갔다. 6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넓은 식탁이었지만 네 명의 자리만 세팅이 되어 있었다.

룸으로 들어온 찬혁이 기명이에게 한마디 한다.

“그런데 무슨 룸으로 예약을 했어. 노친네같이... 이러면 괜히 분위기만 어색해지는 것 같은데.” 

기명이가 식탁에 놓인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한다.

“쫄보처럼 그러지 말고 앉아라 쫌... 그냥 밥 한 끼 먹는다고 생각해. 그러는 니가 더 어색하다 임마.”

기명이의 핀잔에 찬혁은 마지못해 코트를 벗고 기명이와 마주 앉는다.

“그런데 오늘 만남은 어떻게 마련하게 된 거야?”

찬혁의 질문에 기명이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답한다.

“뭐 그냥 어찌어찌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

“싱거운 놈 제대로 말해봐. 어느 정도는 알아야 나도 대처를 하지. 느닷없이 나오라고 난리를 쳐서 나오긴 했지만.”

“음... 너 내가 댄스 모임에 다니는 건 알지?”

“응 그래.”

“거기에서 친하게 지내는 동생이 있는데 같이 밥을 먹기로 약속하면서 아는 언니가 있는데 좋은 사람 없냐고 묻길래 기냥 뒤도 안 돌아보고 있다고 했지. 잘했지?”

“이런 대략 난감한 놈을 봤나. 그래 그래서 그게 나란 말이냐?”

“응 너만큼 괜찮은 놈이 어딨 냐?”

“듣기는 좋다만 내 형편을 알면서 으이구...이 나이에 젊은 애들처럼 친구를 사귀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괜히 쪽팔릴 일을 벌였네.”

“이봐 이봐...니가 그래서 안되는 거야. 벌써부터 김칫국부터 마시잖아. 인생을 뭘 그렇게 힘들게 사냐. 내가 그랬지 그냥 편하게 밥이나 한 끼 하는 거야. 잘되고 안되고를 뭘 미리 걱정하냐.”

“그래 넌 인생을 편하고 쉽게 살아서 좋겠다. 아... 괜히 나온 거 같네.”

“아 그만 좀 툴툴대고 가서 술이나 좀 가져와봐.”

“벨 누르고 시키면 되지 무슨...”

“여긴 벨이 없다. 술은 직접 가져다 먹는 곳이야. 대신 술값이 조금 저렴하거든.”

“으이구...알았어.”

찬혁이 일어나서 홀 쪽으로 나간다. 둥근 모양의 커다란 바가 있는 자리엔 한두 명 정도의 손님이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며 식사를 하고 있었고, 주인은 찬혁을 발견하고는 친절한 미소로 손을 뻗어서 각종 술병이 들어있는 냉장고를 안내한다.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테이블과 바에 손님들이 꽤나 자리한 것을 보고는 기명이의 맛집이라는 호언장담에 살짝 기대를 해본다. 찬혁은 맥주와 소주를 움켜쥐고 자리에 돌아와서 술잔에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 소맥을 말아준다.

“자 여기 받아라.”

“오케이 땡큐.”

두 사람은 서로 잔을 부딪치며 단숨에 술잔을 비워낸다.

“캬 좋다! 그런데 친구야 너 돌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돌싱? 그건 왜?”

“하여튼 어떻게 생각하냐고...”

기명이가 스끼다시로 나온 메추리알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본다.

“뭐 어떻게 생각하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별 상관없어.”

“그래? 그럼 됐어.”

“왜? 오늘 나온다는 여자가 돌싱이야?”

“일단 넌 그냥 모른척해.”

“알았어. 요즘 세상에 뭐 대단한 흠도 아닌데 뭘.”

“오 좋아 그 열린 마인드. 그런 걸 따지는 사람들도 있어서 물어본 거야.”

“뭐 서로 마음 맞고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깊어지고 사랑한다면 그게 뭐 대순가?”

“그렇지 근데 주제 파악도 못하고 무조건 어리고, 이쁘기만 바라는 넋 나간 남자들도 있지. 자신의 주제 파악도 못하는 놈들 말이야. 그런 면에선 넌 내 친구가 확실하네 하하.”

“모르겠어. 내가 아직 세상을 모르는 건지도... 하여튼 난 아직 사랑을 믿어. 그런 사랑을 하고 싶고... 몽상가의 단꿈 일지도 모르지만.”

“아니야 아주아주 좋아. 내가 너 같이만 생겼으면 여자 여럿 울리고 다녔을 텐데. 넌 여자엔 관심도 없는 걸 보면 답답할 때도 있지만 대단하기도 해.”

“내 형편에 어울릴지 모르지만 운명 같은 인연을 기다리고 싶다. 늙어서 만나더라도...”

“또 또 잘 나가다가 옆길로 빠지네. 이 사람아 남자는 자신감이야. 겸손도 정도가 있지. 겸손이 지나치면 주접이야 알았냐?”

“너나 그렇게 살아. 난 나대로 살 테니. 별 걸 가지고 다 지랄을 하네.”

“이 사람이 몸에 좋고 뼈에 좋은 얘기를 해줘도 저러네.”

“됐어! 난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몸을 파는 여자라고 해도 믿고 사랑할 수 있어. 나를 만나기 전에 일은 모두 용서가 돼. 단지 나를 만나고 나서부터 그렇게 안 살면 되지. 또 그렇게 되도록 옆에서 사랑해 주고 도와주는 게 남자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어이구 어이구 성인 나셨네. 나가도 너무 나갔어.”

“나한테 지랄 말고 너나 잘해.”

“아 아 알았어 알았어. 그만하자.”

“자 한잔 받아.”

두 사람은 다시 잔을 기울였다. 차가운 술이 몸속으로 들어가며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주자 찬혁은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꼈다. 그러고는 창밖으로 분주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모습 속에서 두 명의 여자들이 보였고 그중에 짧은 보브헤어스타일에 아이보리 코트와 스카프를 두른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그녀들의 동선을 따라가며 보았다. 그녀들의 발걸음이 느려지며 가게 문 쪽으로 가는 것이 보이자. 왠지 오늘의 주인공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야 야 온 거 같다.”

찬혁의 말에 기명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룸 앞으로 다가가서 문을 열었다.

“어 왔구나. 어서 와.”

기명이의 반응에 찬혁도 몸을 돌려서 그녀들을 마주했다. 찬혁은 기명이의 인사에 활짝 웃는 여자 뒤에서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짧은 보브 커트 머리지만 옆머리가 살짝 긴 헤어스타일에 아이보리 코트 위와 목에 스카프를 두른 모습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히 균형감 있는 체구에 차분한 옷매무새와 표정에서 찬혁은 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 인사해. 여긴 내 댄스 파트너이자 동생인 선영이. 그리고 이쪽은 내 친구 찬혁이.”

“반가워요.”

“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찬혁이 선영이와 인사를 나누고 선영이가 소개를 이어간다.

“여긴 제일 친한 언니예요.”

“아네 반갑습니다. 박 찬혁이라고 합니다.”

찬혁이 목례를 하자 그녀도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배 은미라고 합니다.”

찬혁은 고개를 숙일 때 옆머리가 살짝 얼굴을 가려지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인사를 마치자 기명이가 자리를 안내한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죠.”

기명이가 맞은편 자리에서 자신이 마시던 술잔을 찬혁의 옆자리로 가져와서 앉는다.

네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았고 기명이가 예약한 음식을 요청하는 동안 약간의 어색한 공기흐름이 생겼지만 찬혁은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곧 기명이가 능숙하게 조절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찬혁에게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에 찬혁은 은미의 모습을 슬쩍슬쩍 훔쳐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누군가 인연을 만나면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한 느낌이라든지 혹은 후광이 비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그런 느낌. 그런 영화에서 나올법한 상황보다는 잔잔하고 넓은 호수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던져진 느낌이었다. 작은 원이 그려지다가 점점 커지는듯한 느낌이 비슷할 것이다. 자꾸 눈길이 가기 시작했고, 궁금하다 못해서 질문꺼리 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자 일단 한 잔씩 들 받으시고, 이게 또 알콜이 좀 들어가야 서먹서먹한 게 풀어지거든요.”

기명이의 너스레에 두 여자가 웃음을 터트리며 건배를 하기 위해 술잔을 들자 드디어 기명이만의 스타일이 나왔다.

“오바마!!”

기명이가 건배사를 외치자 선영이가 질문을 한다.

“오바마? 그건 뭐야?”

“이 사람이 아직까지 이런 것도 모르고 말이야. 오빠가 바래다줄게 마시자.”

기명이의 말에 모두가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그 덕분에 분위기는 화기애애 해졌다.

그렇게 건배가 몇 번 이어지고, 기명이와 선영이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찬혁과 은미는 지켜보다가 가끔 서로 눈길이 마주쳤다. 찬혁은 쑥스러우면서도 기분이 묘하게 좋아짐을 느꼈다. 

“두 사람도 말 좀 해요. 고딩들도 아니고 뭐야.”

보다 못한 선영이가 재촉을 하자 기명이가 거든다.

“에헤이 그렇게 대놓고 말하라고 그러면 더 이상 하지. 두 사람 잘 어울리는데 그냥 뽀뽀부터 해라.”

“아유 오빠는 무슨 그런 반가운 소리를... 호호.”

기명이와 선영이의 놀림에 가까운 재촉에 은미도 찬혁이도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면서 찬혁은 다시 한번 은미를 쳐다보았고 눈이 마주친 은미는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은미의 그런 모습에 찬혁의 가슴은 순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느덧 한 시간가량 시간이 흘렀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네 사람은 처음보다 많이 가까워지고 분위기도 무르익었다. 그러다가 은미 앞에 놓인 앞접시를 찬혁이 발견하고는 은미에게 질문을 했다.

“회를 안 좋아하세요? 잘 안 드시네요.”

“아네 제가 회를 잘 못 먹어서요.”

“아 이런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이 녀석이 지가 먹고 싶다고 이곳을....”

찬혁이 기명이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기명이가 머쓱해한다.

“진작 말씀하시지 다른 거 시켜드렸을 텐데...”

“아니에요 아예 못 먹는 건 아닌데 여기 다른 거 먹으면 돼요."

“아유 마음씨도 고우셔라 얌마 찬혁아 넌 복 받은 거야 제수씨가 저렇게 이해심과 배려심이 넓다.”

“오빠 만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제수씨야. 정말 웃겨.”

선영이가 기명이의 말에 끼어들자 기명이도 질세라 말을 이어받는다.

“이 사람들이... 아니 뭐 까놓고 말해서 어린애들도 아니고 좋으면 그냥 직진이지. 소금에 곰팡이 낄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내가 아까부터 딱 보니까 둘이 뭔가 오고 가는 눈치던데... 아니야?”

기명이의 말에 선영이도 찬혁과 은미를 번갈아가 고개를 돌려가며 눈치를 살핀다.

“그러게 처음보다 뭔가 달달 한데? 호호.”

“얘 그만해.”

기명이와 선영이의 놀림에 은미도 싫지만은 않은 듯한 표정으로 꾸짖는 표정을 짓는다.

찬혁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두 여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기명이의 소맷자락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야임마 적당히 해라. 처음부터 뭐 하는 거야 민망하게.”

“아 놔 이 사람이 말이야. 내가 이렇게 안 하면 니가 알아서 하겠냐.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그래 다 좋은데 이제 그만해. 너 취했어.”

“이 사람이 이 사람이... 멀었어 괜찮아. 여기 마무리하고 우리 2차 가자. 노래방 갈까?”

“나 노래방 싫어하는 거 알면서 무슨...”

“야야 초 치지 말고 이 엉아가 하자는 대로 따라와.”

“그만 좀 해 인간아.”

“이 사람이 정말.”

찬혁은 거나하게 취해버린 기명이를 다독이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은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낸다.

“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은미의 말에 실망한 건 사실 기명이만은 아니었다. 찬혁도 내심 아쉬워했다.

“에이 오랜만에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데... 가시게요?”

기명이의 아쉬워하는 말에 선영이도 거든다.

“그래 오빠 나도 가봐야 해.”

“다들 재미없다. 이제 막 시작하는 분위기인데. 그러지 말고 우리 딱 한 시간만 노래방 가서 술 좀 깨고 가요.”

기명이가 마지막 히든카드를 꺼내 들자. 은미가 찬혁이를 바라보며 도와달라는 듯한 표정과 미안함이 섞인 미소를 보낸다.

“그래요.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다음에 또 보면 되죠.”

찬혁이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하자 기명이가 자신의 팔꿈치로 찬혁의 옆구리를 툭 친다.

“그게 맞는 거 같아요. 오늘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보면 좋겠네요.”

선영이 종지부를 찍는 말을 꺼내자 기명이도 이제는 두 손 들었다는 듯이 대꾸한다.

“이 사람들이 정말.... 알았어 알았어. 그럼 딱 한 병만 더 먹고 일어나자.”

기명이의 마지막 제안에 나머지 세 사람은 술자리에서는 늘 이렇게 끈질긴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라는 표정으로 받아 주었고, 기명이를 달래는 건배를 또다시 몇 번을 하고서야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파인 기명이는 연신 원망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계산도 자신이 하겠다며 나누어 내자는 선영이를 뿌리치고 혼자서 계산을 마치고 나왔다.

횟집 밖은 아직도 눈이 흩날리고 있었고, 기명이를 기다리는 나머지 세 사람은 기명이가 나오자마자 작별 인사를 했다. 그때 계산을 마치고 나온 기명이가 누구라도 알만한 행동을 한다.

“자 우리 찬혁이 하고 은미 씨는 알아서 잘 들어가실 테고... 아니지 둘이 같이 있으면 더 좋고. 하하하. 근데 저기... 있잖아 선영아. 나 좀 보자. 할 말이 있는데 잠깐 커피 한잔하자.”

기명이가 낚아채듯 갑자기 선영이의 팔짱을 낀다. 선영이도 짐짓 눈 채 챈 듯이 은미와 찬혁에게 서둘러 인사를 한다.

“언니 조심히 들어가 톡 할게. 찬혁 씨 즐거웠어요 울 언니 잘 좀 바래다주세요.”

“그래 너도 조심히 들어가. 기명 씨 고마웠어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기명아 전화해라.”

손을 흔드는 기명이와 선영이는 기명이의 알 수 없는 귓속말과 장난스러운 몸짓에 하하 호호하면서 눈 내리는 거리의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저 은미 씨 집이 어디세요?”

“저는 부천이에요.”

“아 그럼 여기서...”

“신경 쓰지 마세요. 택시 타고 들어가면 돼요. 찬혁 씨는 어디세요?”

“전 인천이요. 간석동이라고...”

“아 네 처음 들어봐요.”

“여기서 전철 타고 가다가 부평에서 인천 전철로 갈아타면 됩니다.”

“아 그렇구나.”

잠시 몇 초 동안 대화가 끊어졌고 어색하고 뻘쭘한 상황을 깬 건 은미였다.

“저... 오늘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제가 뭘 해드린 것도 없는데요.”

“아까 회를 못 먹는다고 할 때 새우튀김을 챙겨주셔서...”

“아 그거요? 좀 더 일찍 신경 써 드려야 했는데. 미안해요.”

“아니에요. 덕분에 맛있게 잘 먹었어요.”

은미의 고맙다는 말이 찬혁에겐 이상한 기분 좋음과 신기한 들뜸까지 느껴졌다.

“제가 택시 타는 곳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니요. 제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그래요.”

은미가 잠시 망설이다가 찬혁이 이끄는 곳으로 따라나선다.

찬혁은 택시 승강장까지의 거리가 다른 때보다 빨리 가까워짐을 느끼자 조급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고픈 말을 몇 번을 삼키고 삼키다가 바닥에 떨어지는 눈송이만 바라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저... 혹시.”

“네?”

은미가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찬혁은 참지 못하고 결국 말을 꺼냈다는 것에 금세 후회를 했다. 하지만 지금 은미는 찬혁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순간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냥 저... 아 그러니까 요즘 세상이 워낙 험해서 그러는데요.”

은미가 여전히 궁금한 표정으로 찬혁을 바라보고 있다.

“전번을 주실 수 있으면 제가 택시 번호를 문자로 보내 드릴까 하구요.”

누가 들어봐도 궁색한 변명이지만 자신의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찬혁이 귀엽기도 하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은미도 장난기가 발동했다.

“에이 제 나이 아시잖아요. 나이 많은 아줌마한테 누가 관심이나 있겠어요.”

말을 마치고 은미는 내심 어떤 반응이 나올까 궁금해서 일부러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채 찬혁을 바라보았다. 아니다 다를까 찬혁은 곧바로 대답을 했다.

“에이 아니에요. 은미 씨 그렇게 안 보여요. 정말이에요. 오늘 뵙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정말이요? 기분 좋은데요.”

은미는 나이답지 않게 당황하는 모습의 찬혁이 조금씩 자신의 눈에 들어왔다. 적당한 키에 검은색 모직 트렌치코트와 부츠컷 블랙진에 정말로 부츠를 신고, 무지개색 머플러를 한 남자. 그 모습이 은미의 눈에 점점 세세히 보였던 것이다. 사랑은 그런 것인가 보다. 멀리 있어도, 처음 보는 사람도, 자신의 눈에 점점 명확히 보여지는 것! 혹은, 그렇게 보여지는 사람. 그런 것인가 보다. 은미가 걸어가는 걸음을 멈추고 앞서 걸어가는 찬혁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찬혁은 앞장서서 걷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뒤를 돌아본다. 은미가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그냥 옷이 잘 어울리셔서 잠시 구경했어요.”

찬혁은 오래된 낯선 칭찬에 또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여성의 칭찬이던가. 그것도 호감이 가는 여성에게.

“휴대폰 줘 보세요.”

갑작스러운 반가운 소리에 찬혁은 군더더기 없는 재빠른 동작으로 휴대폰을 건네주자. 은미가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고 자신의 휴대폰에 전화를 건다. 은미의 휴대폰에 벨 소리가 울렸다.

“자요. 제 번호예요.”

“감사합니다.”

“호호 감사할 것까지는 없는데. 찬혁 씨 재밌는 사람이네요. 마치 소년 같기도 하고.”

“그래도...”

찬혁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미소와 함께 당황하는 모습 때문에 은미가 찬혁을 바라보며 말을 꺼낸다.

“찬혁 씨 아까 들어보니 우리 동갑이던데. 편하게 말해요.”

“그래도 처음 만난 날인데요.”

“전번 달라는 거 연락하면서 지내자는 뜻 아니에요? 그럼 동갑인데 편한 게 좋잖아요.”

갑작스러운 은미의 제안에 찬혁이 용기를 내본다.

“좋아요. 그럼 말 나온 김에 우리 친구 합시다.”

“친구?”

“네 편하게.”

“좋아요.”

찬혁의 용기 있고 당당한 모습에 은미는 아까의 찬혁의 당황하던 모습이 떠올라서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자 바래다줄게 은미야.”

“어 말도 놓네. 반말하란 말은 안 했는데요 찬혁 씨.”

은미가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은 상태로 찬혁의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말하자. 가까워진 얼굴 때문에 찬혁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고, 그 때문에 은미는 더더욱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친구면 당연히 말을 놓는 거지. 친구한테 존댓말 하는 사람이 어딨 어.”

은미는 찬혁의 빨개진 얼굴이 재미있어서 앞을 가로막고 까치발을 한 채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대며 바라보았다. 그러자 찬혁이 슬그머니 뒤로 한 발짝 물러선다.

“그래 맞는 말이야. 자 여자친구 에스코트해 줘.”

“여자친구? 그냥 친구 아니고?”

“그럼 내가 남자친구야?”

“그건 그렇지.”

“찬혁 씨 정말 재미있다.”

은미는 모처럼 즐거웠다. 두 사람의 나이에 순수하다고 하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두 사람에게만큼은 그러했다. 찬혁도 은미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맑고 청량한 기분 좋음과 기쁨이었다. 이런저런 대화 주제가 하나둘 생겨나고 분위기도 무르익어 가는 도중에 이를 방해하는 택시가 나타났다. 찬혁은 택시가 그토록 원망스럽기는 난생처음이었다. 평소에는 그토록 눈에 보이지 않던 택시라는 물체가 이렇게도 금방 나타나고 또 일부러 훼방까지 놓는 것 같았다.

“찬혁 씨 나 갈게.”

“응 조심히 가. 톡 할게.”

“그래. 찬혁 씨도 조심히 들어가.”

얄미운 택시가 출발하고 찬혁은 물끄러미 멀어져 가는 택시를 바라보았다. 기분 좋은 뿌듯함과 함께 알 수 없는 저릿함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했다. 그때 저만치 가던 택시가 멈추고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민 은미가 다급하게 손짓을 했다. 찬혁은 놀라서 멈춘 택시를 향해서 재빨리 뛰어갔다.

“왜? 무슨 일이야?”

은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음에 만나면 그 목도리 나 줄래?”

“어? 목도리? 이거?”

“응. 맘에 들어서.”

“이거 좋은 거 아닌데.”

“그런 이쁜 무지개 목도리 처음 봐. 갖고 싶다.”

“그래?”

무얼 망설이겠는가. 찬혁은 택시 기사 나무라기 전에 서둘러 머플러를 풀어서 은미의 목에 둘러주자 은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한다.

“아니 지금 말고 나중에. 찬혁 씨는 어떡하려고... 날씨 추운데.”

“난 괜찮아. 은미 씨가 좋다면 이까짓 쯤.”

찬혁의 말에 은미가 환하게 웃는다.

“고마워 찬혁 씨.”

“그래 잘 가. 기사님 잘 부탁합니다.”

택시 기사는 고개를 끄덕거린 후 출발했고, 찬혁은 택시가 안 보일 때까지 눈사람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 찬혁에게는 추운 겨울바람도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고, 길거리의 많은 연인들도 더 이상 부럽지 않았다. 그 모습을 풍경화로 그리자면 그림 속에는 눈 내리는 겨울밤 멀리 보이는 택시 한 대와 눈을 맞으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서있는 한 남자뿐이다. 연인들의 세계는 그렇다. 건물도 거리도 가로등도 심지어 오고 가는 사람들도 의미 없는 하나의 배경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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