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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애수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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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싸라기 May 12. 2024

애 수

5화

어느덧 시간이 흘러서 인천 남동공단에도 벚꽃이 바람에 흩날리는 분홍빛의 파스텔톤 하늘과 각양각색의 꽃들이 만발한 향긋한 계절이 찾아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의 사출 공장 안에는 규칙적으로 들리는 차가운 기계소음들 속에 파묻힌 채, 구석에서 열심히 진땀을 흘리며 일하는 찬혁에게 다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1호기 로봇 좀 봐. 에러 떴잖아!”

구석에서 사출분진을 청소하던 찬혁이 사출팀장의 부름에 부리나케 사출 1호기로 뛰어간다.

“죄송합니다. 못 들었어요.”

“야! 이런 것도 매번 말해야 하냐? 딴생각한 거야?”

“아닙니다. 제가 볼게요.”

찬혁은 황급히 사출기계의 문을 열어서 내부를 살펴본다. 금형의 상측과 하측을 둘러보아도 무슨 문제가 생긴 지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서 얼굴을 금형 안으로 들이미는 순간 사출기계 위쪽에 위치한 로봇 팔이 찬혁의 머리 옆으로 스치듯 내려오자, 팀장이 찬혁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호통이 터져 나온다.

“이 새끼가 뒈지려고 환장했냐! 너 그러다가 꽥 소리도 못하고 죽어! 이리 나와봐!”

찬혁이 무안한 표정으로 팀장의 뒤로 물러서자, 팀장이 리모컨으로 로봇의 작동을 멈춘 후 사출기를 살펴본다. 200도가 넘는 노즐에 플라스틱 원료가 녹아들어서 금형에 주입이 된 후 냉각을 거치고 금형이 열리면, 설정된 시간에 맞춰서 로봇의 팔이 내려와서 성형된 플라스틱 제품을 로봇이 추출해 내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인지, 성형된 제품은 나오지 않고 오작동으로 자꾸만 알람이 뜨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것 봐봐.”

찬혁이 팀장옆자리로 다가서자 팀장은 금형안쪽 코어에 미세하게 달라붙은 레진을 가리킨다.

“여기 이것 때문이야. 코어에 찌꺼기가 눌어붙어서 형패가 안되니까 금형이 다시 열리는 거라구. 로봇 문제는 아니야! 에어로 한번 불어주고 다시 가동시켜라. 다섯 번 정도 사이클마다 확인해야 해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사출기의 문을 먼저 열기 전에 안전장치 해제하고, 로봇의 자동시스템을 먼저 정지하라구! 안 그러면 너 대갈통에 빵꾸가 나던지 쥐포가 되는 거야! 알았어?”

“네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게 아니라 니 대가리에 미안하다고 해야지!”

“네...”

팀장이 면박과 함께 자리를 뜨자 찬혁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팀장의 잔소리도 스트레스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발전이 없는 것 같아서 답답하기만 했다. 빨리 적응을 해서 승진도하고 월급도 많이 받아서 은미를 안심시켜야 한다는 생각만이 간절한 찬혁이다.     


오전 9시.

대부분의 공장 근로자가 그러하듯 10분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10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꿀맛일 줄은 상상도 못 한 찬혁이다. 공장 밖으로 나와서 눈부시게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니 은미가 보고 싶어졌다. 휴대폰을 집어 들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기계소음 때문에 알아채지 못한 카톡이 도착해 있었다. 찬혁은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카톡의 내용을 살펴봤다. 그러나, 그것은 광고성 카톡이 이었다. 실망감에 주머니에 집어넣으려 하는 순간 다시 알림 음이 울렸다. 이번에는 은미의 카톡임을 확인하자 찬혁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많이 바빠? 힘들지?]

[아니 괜찮아]

[어? 안 바쁘면 카톡을 해야지 내가 할 때까지 안 하다니 나쁘다]

[ㅎㅎㅎ 미안미안 지금 하려고 했어]

[거짓말 흥!]

[미안해. 자긴 안 바빠?]

[응 오늘은 한가하네]

[다행이야. 쉬어가면서 해]

[그래 자기도 쉬엄쉬엄해]

“야! 쉬는 시간 지났는데 뭐 하냐. 사상할 거 넘치잖아!”

[은미야 나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내가 나중에 다시 톡 할게]

[그래 알았어 수고해]

은미의 답장도 마저 보지 못하고 급히 뒷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고서 작업장으로 뛰어가는 찬혁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팀장의 손에는, 믹스커피가 들어있는 종이컵과 담배가 들려있었다. 관리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유 부리는 팀장이 찬혁은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못마땅했지만, 내색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십 분의 꿀맛 같은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지 찬혁은 쉬는 시간 동안 밀려버린 제품들을 정신없이 정리해 나갔다. 손에 쥔 커터칼로 성형된 플라스틱제품 모서리에 튀어나온 부분들을 깎고 또 깎아냈다. 한참 동안 소변이 마려워도 참아가며 밀린 숙제를 하듯 간신히 처리해 내자 또다시 찬혁을 부르는 팀장의 소리가 들렸다.

“야 이리 와봐!”

“네!”

찬혁은 혹시 흠이라도 잡힐까 봐 두려운 마음에 부리나케 분쇄실로 뛰어갔다, 허리춤에 양손을 올리고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서있는 팀장은, 불량품들이 쌓여있는 박스를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업무지시를 내린다.

“점심 먹기 전까지 여기 불량품들 전부 분쇄해 놓고, 기계뒤쪽에다가 원료 준비해 놔! 기계마다 50킬로씩 놔두고 PP는 많이 들어가니까 100킬로 가져다 놔라.”

“네 알겠습니다.”

팀장이 분쇄실에서 나가자마자 찬혁은 고속분쇄기에 불량품을 투입한다. 분쇄하는 장소는 공장 뒷마당 가설 천막 안에 있었지만, 분쇄하는 동안의 소음은 귀가 아플 정도로 큰 소음이기에 귀마개를 귀에 꽂아야만 그나마 고통을 덜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정신없이 분쇄작업을 하던 중 누군가 찬혁의 어깨를 두들긴다.

“형 식사하세요,”

평소 친동생처럼 친근하게 대해주는 사장 아들 민수가 점심시간이 되어도 나오질 않자, 식사시간을 알려주기 위해서 분쇄실로 온 것이다.

“어 벌써 밥시간이 된 거야?”

“네 어서 나오세요.”

“그래 알았어.”

찬혁은 분쇄기를 끄고는 꽈배기 도넛에 묻은 설탕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묻은 분진가루를 털어 내기 위해서 샤워를 하듯이 에어건으로 분진가루를 털어 낸다. 그러고는 민수가 기다리는 공장 출입구로 서둘러 뛰어나온다.

“이제 어느 정도 적응 하셨어요?

“그래 하지만 아직 멀었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차근차근 하나씩 배우세요.”

“그래 근데 사출조건 잡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더라고.”

“그거 별거 아니에요. 원리만 알면 나머지는 시간싸움 이죠. 경험치가 쌓여야 하니까.”

“그러게...”

“지금은 원료를 나르고 배합하느라 힘드시겠지만, 형도 나중에 어느 정도 실력이 되면 보조를 한 명 뽑아서 부사수를 붙여 줄 거예요. 그러면 한결 수월해지실 테니 조금만 참고 견디세요.”

“정말이야? 사장님이 그런 말을 했어?”

“네. 영업이 잘 풀려서 물량이 늘어날 것 같아요. 그러면 사출기계도 더 사야 되고, 당연히 사람이 더 필요하죠. 그전에 형이 빨리 배우셔야 해요. 안 그러면 부사수한테 밀리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렇지 그렇지. 알았어 고맙다.”

“자 어서 가시죠. 빨리 먹고 잠깐 눈을 붙여야 오후일과가 한결 수월하잖아요.”

“맞아 한숨 자고 안 자고가 많이 다르더라고. 안 자면 오후에 엄청 졸리고 피곤하고 능률도 안 올라.”

두 사람은 공단 안에 있는 매점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이미 사람들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고 빈자리는 몇 곳 없었다. 늦어버린 점심시간으로 인한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잠시동안 기다리자 두 사람이 마주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생겨났고, 군대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철제 사각 트레이에 밥과 반찬을 양껏 담고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저기... 그런데 말이야.”

두어 번 숟가락을 뜨던 찬혁이 민수에게 질문을 하려 하자 민수가 찬혁을 바라본다.

“아니다. 밥 먹어.”

“무슨 일 있으세요?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보세요.”

“아니야. 나중에...”

“네. 많이 드세요.”

“그래.”

찬혁은 다소 경직되고 고압적인 팀장의 태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기에 팀장에 대해서 물어볼까 하다가 괜히 잘못된 소문이 나서 찍힐까 봐 걱정되자 질문을 하려다 말고 숟가락에 얹혀진 밥과 함께 꿀떡 삼켜 버리고 말았다. 밥알이 넘어가는 식도에 무언가가 걸리듯 고통스럽게 목구멍으로 내려갔다.      


오후 1시.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사출기 앞에서 또다시 팀장에게 꾸중을 듣고 있는 찬혁. 점심식사 전에 원료를 사출기계 앞에 가져다 놓으라고 지시한 것을 놓쳐버려서 야단을 맞고 있었다. 사실은 업무지시를 내린 시간과 점심시간 사이동안에 모든 것을 처리하기가 힘든 것을 감안하지 않고 업무지시를 내린 팀장이 이해와 배려를 해줘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팀장의 업무에 지장을 줬다는 이유만으로 다그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찬혁의 눈두덩이 순간 뜨거워졌다. 억울하기도 하고, 자괴감까지 느껴지는 상황이 서럽기만 한 것이다. 점심시간조차도 마음 놓고 쉬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하기만 했다. 심지어는 사출일을 괜히 선택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자 서러운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다음부터는 신경 쓰겠습니다.”

“이런 것까지 일일이 얘기해줘야 하나? 나이가 이삼십 대도 아니고... 알아서 해줘야지! 우리 직종은 쉴 거 다 쉬고 일 못해. 특히나 너처럼 기술을 배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래야 해. 내가 처음 기술 배울 때는 빵만 먹고 일하기 일쑤였어!”

찬혁은 기가 막혔다. 이것이 맞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별도리가 없었기에 팀장의 말에 수긍하고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네 지금 빨리 가져다 놓겠습니다.”

팀장이 원료를 투입하는 커다란 플라스틱 통을 발로 툭툭 차면서 말한다.

“여기부터 채워놔. 그리고 다 끝나면 나머지 불량품들 분쇄해 놓고!”

“네 알겠습니다.”

25kg짜리 원료를 어깨에 짊어지고 좁은 기계들 사이를 다니다가 문턱에 걸려서 넘어질 뻔 하기도하는 위험한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잠시도 쉬지도 못하고 일을 해야만 했다. 찬혁의 얼굴과 목과 등에는 이미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드디어 모든 원료를 사출기계별로 분배를 해놓자, 팀장은 사출기계를 정비하고 가동하기 시작한다. 찬혁은 팀장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다시 분쇄실로 들어가 입구에서 담배를 한 대 물었다. 그러자 다시 눈가가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못 느꼈던 통증이 몰려왔다. 몇 번을 넘어질 뻔하기도 하고 수차례 기둥에 어깨를 부딪히기도 했는데, 이제 와서 긴장이 풀어지자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때 분쇄실로 민수가 들어와서 찬혁에게 캔 음료를 건넨다.

“무슨 일 있으세요? 왜....”

찬혁의 눈물을 보고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는 민수다.

“아니야. 신경 쓰지 마.”

“무슨 일인데요. 말씀해 보세요.”

“그냥 내가 아직까지도 현장적응이 안 되는 게 짜증 나서 그렇지 뭐.”

“팀장님이 뭐라고 했구나.”

“아니야 그런 거...”

“저도 눈치가 있어요. 뭐라 그랬는데요?”

“아니라니까 신경 쓰지 마.”

“말 안 하면 팀장님한테 직접 물어볼 거예요!”

찬혁은 대답을 하라고 다그치는 민수의 속마음이 고마웠다.

“점심시간 전까지 원료를 가져다 놓으라고 하셨는데 내가 깜박하고 안 해놔서 화가 좀 나셨더라고. 내 잘못이지 뭐.”

민수가 담배연기를 뿜어내고는 혼잣말을 한다.

“시간안배를 잘해서 일을 시켜야지. 밥도 먹지 말고 일을 하라는 건가. 참내.”

“내가 동작이 좀 느려서 그래. 말하지 마 너 믿고 말하는 거니까.”

“알았어요 형. 팀장님이 원래 성격도 좀 급하고 가끔 깜박할 때도 있어서 그래요. 사람은 좋거든요. 그런데 이건 팀장님이 좀 심한 거 같네요. 제가 언제 상황 봐서 분위기 좀 맞춰 볼 테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찬혁은 말이라도 그렇게 배려해 주는 민수가 너무 고마웠다.

“그래 고맙다.”

고맙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의기소침한 찬혁을 보며 민수가 자신의 어깨를 찬혁의 어깨에 툭 치며 눈을 찡긋한다.

“형 조만간 제가 소주 한잔 살게요. 힘내세요.”

찬혁은 신경을 써주는 민수에게 고마움의 의미로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래 알았어. 수고해.”

민수가 분쇄실을 나가고 나머지 담배를 마저 피우자. 전화가 울린다.

“야 바쁘냐?”

항상 묘한 타이밍에 등장하는 기명이다. 찬혁은 너 오늘 잘 걸렸다 하는 심정으로 시큰둥하게 대꾸한다.

“그럼 안 바쁘겠냐? 이 시간에. 바빠 죽겠는데 왜 또 전화질이야?”

“이 사람이 친구가 전화하면 반갑게 맞아줘야지 짜증을 내냐?”

“아 지랄 말고 용건만 말해 나 오늘 일진 안 좋으니까.”

“왜 깨졌냐?”

“그래 깨졌다. 너 깨진 모서리로 맞아볼래? 이게 전화해서 염장질이야.”

“어쩐지 찌그러진 양은 냄비뚜껑 같이 덜그럭 거린다 했다.”

“야 나 바쁘다고 용건만 빨리 말해!”

“무슨 용건. 그냥 한잔 빨자는 거지.”

“어휴 지랄. 나 돈 없어.”

“이 인간이 언제는 네가 전부 산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뭐? 오늘 니가 산다고?”

“그래 이 엉아가 너의 마음을 어루만져줄게. 아니다 어루만져 주는 건 은미씨 보러 하라 하고 난 술잔이나 채워줄게. 하하하.”

“이놈은 하여튼 지 혼자 일찍 끝났다고 약 올리네... 너 그러다 언제 한번 혼난다.”

“그러길래 누가 그런 곳에 취직하라던? 내가 그렇게 말렸구만. 지금도 안 늦었어. 이쪽으로 와라 나랑 같이하자. 같이 일하고 같이 술도 먹고... 얼마나 좋냐.”

안 그래도 오늘 하루 종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의욕상실감 때문에 기명이가 하는 일을 생각해 본 적도 있었던 찬혁이다. 하지만 기명이가 하는 일도 경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커다란 수족관이 달려있는 큰 활어차를 운전해야 하기에 엄두를 못 내고 있었던 것이다. 급여만 놓고 보자면 근무시간대비 훨씬 많은 돈을 받는 것이 부럽기도 했다. 기명이는 여러 번 권유를 했지만 번번이 거절하는 찬혁이 못마땅한 것이다. 오늘은 그런 문제로 다시 한번 얘기해 보기 위함도 있지만, 유난히 목소리에 힘이 없는 친구를 위로해주고 싶은 기명이다. 물론 술친구가 필요한 것이 우선 이었겠지만...

“안돼 은미가 너 자주 만나지 말래. 맨날 술만 먹는다고.”

“이 사람이. 이 사람이. 인생을 도대체 어떻게 사는 거야? 은미씨 안 되겠네. 야 두 사람 다 같이 나와. 내가 오늘 교육 좀 시켜야겠네.”

“이 새끼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네. 끊어!”

“잠깐만 일단 나와 알았지? 은미 씨는 내가 설득해 볼게.”

“지랄하네. 니가 뭔데 은미한테 전화를 해. 하지 마 새끼야.”

“하여튼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 보자. 알았지? 끊는다.”

“야! 야!”

찬혁은 안 그래도 짜증 나고 힘드는데 기명이의 전화로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친구가 술자리를 마련해서 위로해 준다는 것은 좋지만, 은미가 자신의 지금 모습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어쨌든 당장은 일을 빨리 해야 했기에 될 대로 돼라 하는 마음으로 다시 분쇄기 전원을 켜고 불량품을 기계에 넣기 시작했다.     


저녁 8시 30분 간석동.

두 시간의 잔업까지 하느라 파김치가 된 찬혁의 휴대폰으로 마귀의 꼬드김에 넘어간 공주한테 전화가 왔다. 

“자기야. 기명 씨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 같이 보자는데 괜찮아?”

“중요한 일?”

“응 그렇게 말하던데?”

풉 하고 실소가 터져 나왔다. 역시 기명이 다운 잔머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이 나온 것이다.

“중요하긴 그냥 지가 술 먹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그런데 왜 나도 나오라 그랬지?”

“아까 낮에 잠깐 통화했는데 내가 자기한테 허락받아야 된다고 하니까 괜히 그런 거지. 그리고 자기 본 지도 오래되기도 했으니 얼굴 한 번 보자고 하는 거야. 별거 없어.”

“아... 그래? 난 또 중요하다고 해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했지. 둘이 싸웠나 걱정도 했고.”

“아니야 우리 둘은 싸울 수가 없어. 항상 둘 중 하나는 참으니까. 그리고 기명이가 친구라서가 아니라. 술을 하도 좋아해서 문제지 괜찮은 놈인 건 자기도 알잖아.”

“그래 좋은 사람이지. 늘 자기 걱정해주고...”

“그래서 자기도 나오기로 한 거야? 지금 어딘데.”

“난 집이지. 부천으로 온다던데. 자기가 이쪽으로 오면 너무 피곤하지 않겠어?”

“부천으로 온데? 아놔 그놈 진짜... 알았어. 내가 지금 가면 대략 삼사십 분 정도 걸려. 도착해서 전화할게.”

“응 알았어 조심히 와.”

찬혁은 아무리 친구라 해도 평일엔 술 약속은 잡지 않는다. 일도 힘든 데다 술까지 먹으면 다음날 늦잠을 자거나, 늦잠을 자지 않더라도 하루 종일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한술 더 떠서 부천에서 만나자고 했으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지만, 늦은 저녁 은미가 인천으로 오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해서 참기로 했다.     


저녁 9시가 조금 넘은 부천 어느 소곱창집.

세 사람이 동그랗고 커다란 쟁반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소곱창을 주문을 했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는지 멀뚱하게 두 친구를 둘러보는 은미와 못마땅한 듯 기명이를 쳐다보는 찬혁 그리고, 혼자서 싱글벙글한 기명이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모이니 얼마나 화기애매 하냐. 안 그러냐 친구야.”

“됐고! 술이나 따라봐.”

“오케이 따르시오 따르시오.”

기명이가 찬혁의 마음을 풀어주려 특유의 익살스러움으로 찬혁의 잔에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 따라준다. 

“기명 씨 중요한 일이란 게 뭐예요?”

은미가 더 이상은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듯이 질문을 하자, 기명이가 멋쩍은듯한 미소를 짓는다.

“아... 그거요? 음 찬혁이가 요즘 많이 힘든 것 같아서 응원도 할 겸 이직도 권해보려는데 이놈이 고집을 부려서요.”

은미가 찬혁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많이 힘들어?”

“아니야. 저놈이 괜히 넘겨짚는 거야. 괜찮아.”

기명이가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둘의 대화에 끼어든다.

“괜찮기는! 세상 고민은 다 짊어진 것처럼 목소리에 매가리가 하나도 없더구만..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죽을 맛 이면서.”

“너 진짜 죽을래?”

찬혁이 정색을 하며 기명이를 노려보자 기명이가 한술 더 뜬다.

“야 야 그런 건 창피한 게 아니야. 힘들면 힘들다 하고 서로 격려도 하고 의지도 하는 거지. 그런 게 우정이고 사랑 아니냐?”

“그만해. 술이나 마시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은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찬혁에게 술을 따라준다. 

“자기야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내가 큰 도움은 못되더라도 나 몰래 혼자 힘들어하는 건 마음이 편하지 않아.”

“아니야 정말 괜찮아.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미안하긴... 내가 더 미안하지. 나 때문에 직장을 옮기고 힘들어하는데.”

두 사람의 대화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기명이가 다시 끼어든다.

“그래 말나 온 김에 내가 말했던 거 생각해 봤어?”

“고맙긴 한데 글쎄다. 운전면허 딴 지도 얼마 안 됐고, 아무리 1종이지만 큰 트럭을 운전한다는 게 도무지 감당이 안 된다.”

고기 구이판 위에 노릇노릇하니 먹음직스럽게 구워지고 있는 곱창을 뒤적거리던 기명이가 나무라는 듯이 말한다.

“이 사람이 또 또.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서 어떻게 은미 씨를 책임지려고 그러냐?”

“얌마 자신감이 없는 게 아니라 조심하는 거지. 아무거나 막 들이대면 세상이 내 생각대로 뭐든 척척 일이 풀린다던? 너는 제 삼자니까 말을 편하게 하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도와준다잖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은미가 맥주가 든 술잔을 들이키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기명씨가 생각해 주는 건 고마운데요. 찬혁 씨도 생각을 안 하는 것도 아니니 조금 더 기다려 봐요.”

기명가 답답하다는 듯 소주잔을 단숨에 비워내고 곱창 한 점을 입에 밀어 넣으며 대답한다.

“아휴 답답해 어째 두 사람이 똑같냐? 알았어요 뭐 강가에 데려다줄 순 있지만 물고기를 잡는 건 본인한테 달렸으니... 언제라도 말해라. 알았지?”

찬혁은 기명이가 이런 상황을 만든 것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괘씸하다가도 자신을 생각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 낮에 있었던 공장일이 떠오르자 이내 얼굴이 어두워졌다. 자신에게 술을 따라주는 찬혁의 얼굴을 보고는 기명이가 은미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신호를 보내자. 은미가 슬며시 찬혁의 손을 감싸듯이 잡아준다.

찬혁은 무슨 의미인지 눈치를 챘기에 코끝이 찡했지만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황급히 자신의 술잔을 들고는 평소보다 천천히 그리고, 길게 술잔을 비워냈다. 그러면서 고맙다는 의미로 은미의 손을 꼬옥 잡았다. 어느덧 시간은 저녁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자.”

내일 출근이 걱정되는 찬혁이 계산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자, 기명이가 찬혁을 말린다.

“됐어 임마. 내가 낼 거야.”

“니가 계산을 많이 하니까, 오늘은 내가 낼게.”

“내가 너보다 더 벌잖냐. 나중에 로또라도 당첨되면 한 번에 몰아서 거하게 쏴라.”

“염병... 야! 더 벌고 못 벌고 가 뭔 상관이냐.”

“됐다고! 오늘은 너 기분 풀어 주려고 내가 나오라고 한 거잖아. 그러니 이리나와,”

기어코 자신이 계산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기명이가 찬혁을 자리에 앉히고 계산대로 간다. 

“자기야 많이 마셨지? 괜찮겠어?”

“응 이 정도는 괜찮아. 도착하면 전화할게.”

“그래 알았어.”

찬혁을 바라보는 은미의 표정에 걱정과 안쓰러움이 묻어있었다. 계산을 마친 기명이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며 능청을 떤다.

“마음 같아서는 한잔 더 하자고 하겠지만 딱 보니 두 사람만의 시간이 필요한듯해서 눈치껏 빠져준다.”

찬혁의 손반닥이 비니를 눌러쓴 기명이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지랄도 풍년이다. 빨리 택시 타고 가자! 중간에 내려줄 테니까.”

기명이가 멀뚱한 표정으로 찬혁과 은미를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은미 씨 찬혁이 그냥 보내게요? 너무 했다. 이런 날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찬혁의 손바닥이 다시 한번 기명이의 뒤통수를 강타한다. 두 손으로 뒤통수를 움켜쥔 기명이를 찬혁이 잡아먹을 듯이 바라본다.

“아이고 아파라.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야? 아휴 재미없는 놈.”

“으이구 좀 작작해! 분위기 봐가면서 장난쳐라.”

두 사람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빙그레 미소 짓던 은미가 작별 인사를 한다.

“오늘 고마웠어요 기명 씨. 조심히 가시고 또 봐요.”

“아니에요. 제가 두 사람 덕분에 잘 먹었죠. 반가웠어요. 자주 봐요.”

“뭘 자주 봐. 이리 와 가자! 자기야 나 갈게 조심히 들어가.”

찬혁이 다시 때릴 듯이 손을 들자 기명이가 피하는 모습을 하며 걸어간다. 은미는 두 사람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며 무거워지는 마음으로 이내 얼굴이 굳어진다. 마치 자신 때문에 찬혁이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멀찌감치 은미의 모습이 사라지자 기명이가 찬혁을 불러 세운다.

“찬혁아. 너 지금 많이 힘들지?”

“왜?”

“나한테만은 솔직히 말해도 돼!”

“.......”

찬혁이 대답대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그러고는 이내 깊은 한숨처럼 담배연기를 허공에 길게 뿜어낸다.

“나이도 있는데 빨리 결정해야 해.”

“알고 있어.”

기명이가 가위질 모양으로 손짓을 하자 찬혁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건넨다. 두 사람의 자욱한 담배연기만큼이나 잠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기명아.”

“왜?”

“다른 건 모르겠고, 내가 하는 일이 맞는지 모르겠다. 네가 권유하는 건 고마운데 솔직히 이 나이에도 앞날이 안 보이니 걱정이야.”

찬혁이 어금니로 담배를 물고 고개를 숙이자 기명이가 찬혁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네 마음 알아. 아니 알 것 같아. 너 혼자일 때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거든.”

고개를 떨군 상태에서 담배연기가 얼굴을 감싸고 머리 위로 올라가자, 찬혁의 신발 위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진다.

“역시 많이 힘들구나.”

기명이가 찬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이 나이 먹도록 뭘 했는지... 앞으론 은미 앞에서 이런 얘기하지 마라.”

“그래 알았다.”

“그리고 내가 부탁할 때까지 직장 옮기라고 말하지도 말고.”

“알았어 대신 힘들면 언제든 나한테 먼저 말해라 알았지?”

찬혁은 고개를 들어서 기명이를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젖어 있었지만,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짜식! 약해빠져 가지고... 니 옆에는 항상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마라.”

“징그럽게... 됐어 임마.”

“어? 어? 진짠데. 너 언젠간 내가 필요할걸. 내가 너의 수호천사잖아!”

“어이구 그러셔요?”

“어 어 안 믿네. 두고 봐라 내가 널 구해줄 날이 있을 테니.”

찬혁이 소매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의기양양하게 허세를 떠는 기명이를 슬쩍 바라보곤 큰소리로 웃는다.

“하하하. 그래 그래 말이라도 고맙네. 수호천사.”

“아놔 이 사람이 정말로 안 믿네.”

“믿을게 믿는다고! 그러니 이제 그만하고 가자. 나 빨리 자야 해.”

“보채긴 알았어 가자.”

쓸쓸한 뒷모습과 무거워 보이는 어깨를 한 찬혁을 지그시 쳐다보는 기명이는 잠시 후 택시를 잡아탔고, 은미가 사는 부천을 빠져나와서 인천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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