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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애수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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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싸라기 May 19. 2024

애 수

6화

“자기 정말 괜찮은 거지?”

“그게 무슨 말이야. 괜찮은 게 아니라 기쁜 일이지.”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 그래도 난 첫 만남이라 걱정이 돼서...”

“걱정 마 잘 될 거야.”

두 사람은 의논 끝에 동거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 번째 관문이 있었으니, 은미의 딸인 은정이와 만남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이미 결혼을 생각하고 만났지만, 앞으로의 경제적인 부분을 고려해서, 찬혁이 은미가 사는 부천으로 옮기기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첫 대면을 위한 장소로는 부천 인근의 한식당에 예약을 한 후 두 사람은 은정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회색 바탕에 검은색의 앙증맞은 꽃무늬가 프린트된 원피스를 입은 뽀얀 얼굴의 젊은 여자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찬혁은 직감적으로 은정이임을 알 수 있었다.

“은정이 맞지?”

“응.”

은정이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약간 경직된 표정으로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찬혁이 자리에 일어서서 은정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반갑다. 은정아.”

“잘 찾아왔네. 이리로 앉아.”

은미가 옆자리로 안내하자 찬혁은 두 사람의 맞은편으로 옮겨 앉으면서, 미리 예약한 음식을 요청했다.

“엄마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다.”

“아 네...”

내성적인 성격처럼 보이는 은정이의 모습에 분위기가 어색했다. 

“직장 생활하느라 힘들지?”

“네. 뭐 그렇죠.”

분위가 딱딱함을 느낀 은미가 핀잔 섞인 말로 주제를 바꿔본다.

“내가 전에 말해서 알지? 아저씨가 이번 주말에 짐을 옮길 거야. 그러니 시간 날 때 어질러진 네 방정리 좀 미리 해라.”

“엄만... 알았어.”

찬혁이 맥주를 주문한 후 은정이에게 질문을 한다.

“은정이도 술 할 줄 아니? 맥주 할래?”

“아니야 자기야. 얘는 술 먹으면 안 돼.”

“왜?”

“몸이 안 좋아서 지금 약을 먹고 있거든. 너 음료수 마실래?”

“아니 괜찮아.”

찬혁은 술의 힘이라도 빌려서 첫 만남의 어색함을 깨고 싶었던 것이다. 찬혁은 자신과 은미에게 맥주를 따르고는 건배를 제의한다.

“어쨌든 이렇게 한 식구가 되었으니 잘 부탁한다. 은정아.”

찬혁의 건배 제의에 은정이는 엄마와 찬혁의 술잔에 자신의 물 잔을 들어 올린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간혹 은미와 은정이만 일상적인 대화가 오고 갈 뿐 찬혁은 은정이의 눈치를 살피느라 노심초사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드디어 은정이의 첫 질문이 시작됐다.

“저 아저씨...”

찬혁이 맥주를 마시다 말고 잔을 내려놓고 은정이를 바라본다. 그 모습은 마치 면접관 앞에 있는 신입사원처럼 허리를 곧게 세운 자세였다.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실례가 안 된다면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그래 뭐든 물아봐.”

“저... 저희 엄마랑 결혼하실 생각이시죠?”

“응 당장은 아니고 계획은 있어.”

“그래서 여쭤보는 건데요. 혹시 아이는 갖고 싶지 않으세요?”

은정이의 질문에 당황하는 쪽은 오히려 은미였다.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니야 괜찮아 궁금할 수 있지.”

찬혁이 당황해하는 은미를 말렸다.

“결혼하시면 2세가 보고 싶으실 텐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황스럽지만 예상 못한 질문은 아니었기에, 찬혁은 잠시 맥주잔을 바라보면서 미리 생각했던 나름대로의 모범답안을 차분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지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란다. 그런데, 내 욕심만 내세우기엔 내 나이나 엄마 나이로나 현실적으로 힘들지. 게다가 아이를 갖는다고 해도 태어날 아이가 스무 살이 될 때 즈음 내 나이가 이른 살을 훌쩍 넘는다고 생각하니 힘들겠구나 하고 생각이 드는구나. 그래서 엄마와 난 포기하기로 결정했단다.”

은정이가 다소 놀랍다는 표정으로 찬혁을 바라본다.

“나중에 후회되지 않으시겠어요?”

“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을 내 욕심대로만 할 순 없잖니? 네 엄마와 늦게 만난 만큼 애인처럼 친구처럼 서로 의지하며 그렇게 남은 인생을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은정의 시선이 찬혁에게서 앞에 놓인 물 잔으로 이동하자, 찬혁이 말을 마무리한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아니 네가 괜찮다면 너를 내 딸이라고 생각하고, 친하게 잘 지냈으면 생각하는데... 너무 빠른가?”

찬혁은 식사자리에 오기 전 은정이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듣고 어느 정도 준비했던 말을 꺼낸 것이다. 딸이라는 표현을 들은 은정이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반찬 가짓수가 몇 개인지 세듯 상위의 반찬 그릇들을 두루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운 상황임을 느낄 수 있는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글쎄요... 거기까지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아서요.”

“그래 그렇겠지. 당장 대답이 어려울 거야. 천천히 생각해 보고 말해주면 고맙겠다. 혹시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안될 것 같으면 굳이 말 안 해도 된단다.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으니까.”

“네...”

무거운 대화 때문에 다시 어색한 분위기가 생기려 하자 은미가 화제를 바꾼다.

“아저씨가 주말에 짐을 옮기고 우리끼리 소소한 파티를 할까 하는데 시간이 괜찮아?”

“글세 모르겠어. 약속이 있을지도 몰라.”

“그래? 미리 예약해야 하니까. 적어도 하루 전에는 말해라.”

“응 알았어.”

세 사람은 잠시 대화를 중단하고 다시 식사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새로운 분위기에 적응하기 위해서 각자의 머릿속은 많은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식당 마당에는 봄바람과 함께 벚꽃이 눈송이처럼 흐드러지게 흩날리고 있었고, 식당입구 옆 돌담에는 하얀 목련이 탐스러운 모습으로 함박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말오후 3시경. 

“자기야 경차에 다 들어가? 힘들면 이삿짐센터를 불러.”

“아니야 짐도 얼마 없어. 꾸역꾸역 다 들어갈 것 같아.”

“그래? 다행이네. 못 도와줘서 미안하네...”

“아니야 자기가 와도 도와줄 게 없어.”

“그래 그럼 조심히 와.”

“알았어. 조금 있다가 보자고.”

찬혁은 마지막 짐을 차에 싣고서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휑하니 비워진 방과 화장실 그리고, 수백 번을 오르내렸던 계단과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가지 경제사정으로 힘들었던 시간들과 은미를 만나고 즐거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이 공간이 다시 보고 싶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원룸의 옵션으로 있었던 책상과 침대 그리고, 문고리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잠시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을 때 기명이의 전화가 울렸다.

“오늘 이사하냐?”

“그래 잘 있어라. 친구야.”

“이 사람이... 먼 곳으로 가는 사람처럼 말하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거 아니야? 이제 너랑 늦게까지 술 마시는 것도 끝이다.”

“어허... 이거 이거 누가 들으면 내가 너를 못살게 한 줄 알겠다.”

“농담이야. 그간 고마웠다.”

“어 어 점점...”

“하하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니가 부천으로 오든지 내가 이리로 오든지 하면 되지.”

“이 엉아를 두고 가니까 속이 후련하냐?”

“에이 무슨...”

“하여튼 은미 씨 잘 챙기고 행복하게 살아라!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그래 고맙다. 이제 출발해야 해. 연락할게!”

“그려 조심해서 가고 조만간 한번 보자.”

“그래 간다.”

전화를 끊고 찬혁은 방안을 다시 한번 휘이 둘러보고는 출입문을 살며시 닫고 1층으로 내려왔다.

“잘 있어라 인천!”

찬혁은 경차에 몸을 싣고서 내비게이션을 열어서 저장된 은미의 집을 선택한다.

[봉봉이네 집]

경로를 선택하기 전에 저장된 이름을 변경한다.

[우리 집] 변경 저장!

찬혁은 새로 저장된 주소를 선택하고 설정된 경로를 따라서 출발했다. 차는 작았지만 가득 실린 짐과 함께 설레는 희망이 얹혀 있었다. 주변의 건물들을 보기 위해서 천천히 움직이던 경차는, 액셀레이터에 힘차게 힘이 실리자마자 빠르게 속도를 내며 드디어 인천을 빠져나갔다.       


오후 6시경 부천.

“은정이는 약속이 있어서 같이하기 힘들게 됐어.”

“아 그래? 아쉽네.”

“우리끼리 저녁 먹자. 뭐 먹고 싶어?”

“자기가 쏘는 거야?”

“당연하지! 이제 부천시민이 됐는데 내가 쏴야지, 말만 해!”

뭐든지 사줄 것 같은 의기양양한 어깻짓으로 힘주어 말하는 은미는, 오늘따라 유난히 들뜬 모습을 감추기 힘든 듯 과장된 추임새를 보인다. 그러자 찬혁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럼 한우 먹자! 한우 콜?”

예상치 못한 메뉴 선택에 은미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당황한 눈짓으로 말한다.

“야아... 그건... 그런 건 내가 사줄 수 있지만, 오늘은 그거 말고 다른 거 먹어.”

찬혁은 평소 은미가 뭔가 못마땅하거나 불만 있을 때 보이는 표정이 보이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으이구 내 그럴 줄 알았다. 말만 하라며!”

“아니 그래도 그건... 하여튼 그건 다음에 사줄게 응?”

“하하하 알았어 그럼 자기가 좋아하는 삼겹살 먹을까?”

평소에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어보면 늘 삼겹살을 먼저 떠올리는 그녀였기에, 당연한 질문이었다. 결국 삼겹살 이야기가 나오자 은미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그래? 삼겹살이 먹고 싶었구나. 그 정도는 얼마든지 사주지.”

“하하 이런 얌체 같으니라고.”

“저쪽 골목 끝에 가면 소고기보다 맛있는 대패 삼겹살집이 있어. 은정이랑 한번 가봤는데 정말 죽이더라.”

은미의 익살스러운 뻔뻔함에 찬혁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새로운 환경에 부담스러울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라도 신경을 써준다는 것을 알기에 고마웠던 것이다.   

“사장님 여기 대패 4인분 주세요.”

잠시 후 넓고 둥근 양은쟁반 위로 연필깎이로 깎아놓은 듯 동 그렇게 말린 먹음직스러운 대패 삼겹살과 각종 밑반찬들이 담겨 나왔다. 은미가 술잔을 들며 찬혁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자! 부천시민이 된 걸 축하해!”

찬혁이 술잔을 들고 잔을 부딪치며 은미를 바라보았다. 

‘이쁜 내 여자...’ 

찬혁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은미의 술잔에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두 사람의 밝은 앞날을 축복하는 듯한 종소리처럼 맑고 경쾌하게 울렸다.

“자 여기는 이렇게 먹는 거야.”

은미가 익어가는 삼겹살 위로 김치를 덥석 얹어놓더니 제법 익숙한 솜씨로 휘휘 저어가며 먹기 좋게 섞어준다. 그러고는 보물보따리처럼 상추쌈을 야무지게 싸서는 찬혁의 얼굴 앞으로 내민다. 찬혁이 상추쌈을 단숨에 입안에 넣고 볼이 터져라 씹고 있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은미가 어린아이가 보채듯 물어본다.

“어때 맛있지? 그치?”

찬혁이 대답대신 엄지를 치켜세우고는 고개를 끄덕이자 은미가 만족스러운 눈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허기진 배도 채우고, 건배도 몇 차례 한 후 분위기가 무르익자 은미가 찬혁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은정이랑 당분간은 친해지기 전까지 불편할 수 있어. 내가 말은 잘해놨지만 아무래도 머리가 다 큰 애라서...”

“그래 알고 있어. 남자애도 아니고 엄연히 다 큰 여자애니까 내가 조심하고 잘해야지.”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

“고맙긴 당연한 거지...”

“다행히 오늘은 은정이가 안 들어올 거 같으니까, 오늘은 대충 정리하고 일찍 쉬자. 내일 마저 정리하고... 자기도 피곤할 테니까.” 

“그래. 자 건배!”

“건배!” 

두 사람은 앞으로 살아갈 계획과 동네 주변의 정보도 나누며, 술병에 남은 술을 마저 비워냈다. 가게 밖에는 솜사탕처럼 달큰한 향기를 품은 바람이 제법 온기를 지닌 채 부드럽게 불고 있었다.       


며칠 후 은미의 집 주변 호프집.

“아니 오늘따라 왜 이러셔?”

“왜 뭐가?”

“오늘따라 술 마시는 속도도 그렇고 분위가 많이 다르니까 하는 소리지.”

“뭐 그냥... 술이 안 받네.”

“뭔데 뭐가 그렇게 초조한데?”

“아니야. 그런 거...”

“음... 아닌 게 아닌데. 형부가 힘들게 해? 아니면 벌써 바람을?”

“기집애 별소릴 다하네.”

텔레마케터 겸 고객센터에서 응대하는 일을 하는 은미는 같이 일하는 세 살 아래 동생이자 술친구인 장미진과 모처럼 저녁식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예전 같지 않은 은미의 모습에서 미진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것이다. 은미의 눈치를 보느라 테이블에 놓인 마카로니 과자만 축내고 있던 그녀를 보며 은미가 입을 열었다.

“미진아.”

“그래 말해봐.”

“너도 대충 들어서 알지만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는 걸까?”

“뭐 형부랑 동거하는 거?”

“그것도 그렇고 나 때문에 그 사람이 직장을 옮겨서 힘들어하는데, 나 몰라라 하는 것도 그렇고...”

미진이가 마카로니 과자를 입에 물고서는 답답하다는 듯 은미를 쳐다본다.

“참 언니도 언니 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뭘 그렇게 깊게 생각해? 두 사람이 좋아서 같이 사는 거고, 형부일은 형부가 알아서 하겠지. 왜 형부가 많이 힘들데?”

은미가 테이블에 놓인 생맥주잔을 들어서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는다. 

“그 사람은 아니라고 괜찮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억지로 참는 것 같아서 그래.”

“으이구 지금 자랑하는 거야? 귀엽다 귀여워!”

“얘가 지금 언니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까불지 마라.”

은미의 호통에 미진은 테이블에 상체를 가까이 붙이고 얼굴을 들이민다.

“언니! 언니 마음 잘 알아. 그동안 혼자 지내다가 다시 뭔가 시작하려니 걱정되고 조바심 나는 거... 너무 앞서서 걱정하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 이 신혼을 즐기라고.”

은미가 생맥주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초조한 듯 생맥주잔의 손잡이를 엄지 손가락으로 긁는다.

“그래 그래야지.. 그런데 왠지 마음이 좀...”

“물론 형부 나이도 있는데 새로운 직장이 쉽진 않겠지. 정 힘들면 장사라도 하라고 해봐.”

“얘는 장사는 뭐 쉬운 줄 아니?”

“당연히 뭐든 쉬운 건 없겠지. 힘들면 그렇게라도 해보라는 거지. 가게하나 얻을 돈은 있을 거  아니유.”

“......”

은미가 술잔을 들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자, 미진이 넋을 잃고 바라본다.

“아니 이 언니가 갑자기 급발진을 하고 난리야.”

은미가 무거운 생맥주잔을 내려놓고 한숨을 길게 뱉어내자, 미진이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기댄 채 놀란 듯 입을 벌린다.

“아니... 설마... 아니지?”

“....”

“진짜야?”

“응...”

“아......”

두 사람의 침묵이 한동안 이어지고 은미는 생맥주잔을, 미진은 은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창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에휴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그중에 하필이면... 인연도 참.”

“입 닫아. 모른척해.”

“아니 그래도 그렇지 몇 천만 원도 없다는 게...”

“시끄러워! 그만해!”

지금까지 처음 보는 은미의 호통에 미진이도 순간 당황해한다.

“미안해 언니. 나도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

은미의 요청에 술집주인이 생맥주가 가득 든 새로운 술잔을 들고 오자. 은미가 입을 열었다.

“우리 두 사람. 서로 숨기는 거 없이 모두 알고 만났고, 지금까지 사랑하고 의지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사람... 알고 보면 참 딱한 사람이야.”

“세상에 나름대로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

은미의 따가운 눈총에 미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에잇 나도 모르겠다. 언니가 알아서 해 무슨 말만 하려 하면 저렇게 난리니.”

은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잔을 내민다.

“그래 미안해. 네가 날 생각해서 하는 말이란 거 알아. 하지만 내 마음도 이해해 줘.”

“어이구 알았어 알았어. 갑자기 술이 확 땡기네.”

“자 한잔 하자.”

두 사람은 건배를 하고는 오래도록 잔을 기울였다. 은미는 술을 마시면서 찬혁의 손을 떠올렸다. 남자로서는 드물게 부드럽고 뽀얗던 손이 거칠어지고 손톱에는 기름때가 낀 모습이 생각이 난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 어떤 도움을 못주는 것에 대한 무기력함과 미안함이 몰려왔다.

“언니 힘내. 내가 큰 도움은 못되겠지만 언제든 힘들면 말해. 내가 힘을 보탤게.”

“말이라도 고맙다.”

“진심이야. 내가 좀 모아둔 돈이 있거든...”

“마음만 받을게.”

“알았어. 지금은 그렇다 치고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알았지?”

“그래 그럴게.”

미진이가 테이블에 있는 생맥주잔을 옆으로 밀더니 은미에게 호기롭게 제안을 한다.

“언니 난 이걸로 안될 것 같은데... 우리 간만에 소주 한잔 할까?”

“얘는 섞어먹으면 안 돼!”

“아니야 나가서 언니가 좋아하는 매운 닭발에 소주 일 잔 하자 응?”

“평일이야. 내일 못 일어나면 어쩌려고.”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합시다. 난 마셔야 할 것 같다. 가자 응?”

“얘가 진짜 어쩌려고...”

“자자 이럴 시간에 후딱 가면 되겠다. 딱 각 일병 씩만 하자고.”

“참내 넌 정말 못 말리겠다.”

은미는 미진이가 반 강제로 이끄는 대로 생맥주집을 나와서 다음 술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기분을 풀어주려는 미진이와 달리 은미의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찬혁의 어두운 모습과 서글픈 마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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