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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님이 Jun 27. 2024

슬픔을 견디는 시간

 남편의 핸드폰 암호를 한 번에 풀었다. 나랑 똑같은 암호를 번호로 걸어 놓았던 건 자신의 운명이 이리 될 줄 알았던 나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을까.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그 와중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숨겨놓은 빚이라도 있을까. 혹시 숨겨놓은 비상금이라도 있을까 했으나, 정말 하나도 없었다. 남편의 재산은 빚도 예금도 단 한 푼도 틀리지 않고, 내가 아는 금액 그대로다. 남편이 집에 남긴 물건이라고는 전자담배, 아이패드, 손목시계, 모자, 그리고 몇 권의 책이 전부이다. 남편의 물건을 치워도 늘어난 공간이 별로 없는 것을 보니, 참으로 조용히 일상을 살아간 사람. 그러고보니 기록을 한답시고 펜이며 다이어리며 스티커며 잔뜩 모아둔 나의 물건들이 잡다하게 느껴진다.


  남편 핸드폰 속에 저장된 사진이 5,000장이 넘는다. 100장 정도 되었을까. 사진을 정리하는 일은 너무 힘들어 그만 두었다. 남편의 옷과 물건을 정리하는 일도 중간에 포기하였다. 몇 가지만 추려 유품소각하는 업체에 보내고, 그대로 두었다. 어느날 갑자기 모두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그때 정리하자고 마음 먹는다.


  일상은 돌아오고 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출판하지 못할 글이지만 쓰기 시작했다. 작년부터 눈이 너무 시리고 부셔서 힘들지만, 책도 읽는다. 아이들은 학교에 잘 다니고 있으며, 첫째는 장례식 끝나고 치룬 중간고사도 잘 보고, 자기의 목표를 세워 열심히 공부중이다. 둘째는 축구가 시들해졌는지 수영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욕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고, 옷도 자주 갈아입겠다고 했다. 셋째는 여전히 해맑고 부지런하다. 벌써 그가 떠나고 이렇게 세번째 계절을 맞이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일상으로 무사히 안착중이다.


  그러다 문득, 남편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을 떠올린다. 이런 생각은 해도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한 번씩 헤어나오지 못할 수렁에 빠진다. 아들들에게는 어느 정도 클 때까지 목욕탕을 가는 일은 이제 불가하다는 것. 축구를 같이 해 줄 아빠가 없다는 것. 축구에 대한 지식을 전해줄 수 있는 아빠가 없다는 것. 좋은 노래와 영화를 많이 알고 있던 남편을 나는 대신할 수 없다는 것. 나는 아직 운전이 서툴러 차를 타고 가야 하는 여행은 못하겠지. 여름휴가가 벌써 걱정이다.


 이렇게 되고 나서야 나는 그렇게 외로움을 타는 성격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을 많이 만나지 않아도 힘들지 않았던 이유, 남편이 첫사랑이었던 이유. 남편이 떠나도 그 빈자리를 다른 일상으로 채워나갈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20년을 넘게 사랑하고, 싸우고, 미워했던 남편에 대한 그리움. 이것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20살 중반에 만나 20여년을 함께 의지하며 살아오며 더 많이 믿어주지 못했던 마음이 더해지는 날이면, 미안함과 죄책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남편을 그리워 하며 슬픔을 견디는 시간. 이제 아이들을 위해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들을 위해, 남은 날들은 나의 용기가 더 필요한 시간이라 기록해본다. 언젠가는 덤덤해지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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