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하는 게 너무 어려워요.
혹시라도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계속 생각만 하게 돼요.
아무 일도 없는데… 항상 긴장하면서 지내요.”
상담실을 찾는 내담자들 중 많은 이들이
이처럼 불안을 호소하며
그 감정을 없애.. 편안해지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막상 무엇이 불안한지 내용을 물어보면
“막연해요”
라는 대답이 돌아오곤 한다.
표면적으로는 일상도 잘 유지되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내담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 그 모든 것들이 다 불편하고 어려워요.”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절망’이야말로
진짜 병이라고 말했다.
이 병은 몸이 아파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나의 모습을 외면하고,
나 아닌 모습으로 살아갈 때 생기는 고통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절망은 자기가 자기를 잃어버리고,
자기가 자기를 되찾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불안은 바로 그런 상태에서 시작된다.
지금 느끼는 불안은 어쩌면
내가 나답게 살고 있지 않다는 걸
마음이 알려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불안은 나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내면의 작은 목소리일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나’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다정한 사람처럼, 괜찮은 사람처럼,
기대에 부응하는 누군가의 딸, 아들, 부모, 어른처럼.
이처럼 사회가 정해놓은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 속에서,
정작 나와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면서도,
어딘가 무력하고 공허한 감정이 계속된다면,
그건 어쩌면 내 안의 ‘진짜 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을 병이라 말하면서도,
그 불안이 자기를 찾기 위한 출발점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불안은 ‘내가 자유롭다는 가능성’에서 비롯된다.
“불안은 자유의 어지러움이다.”
그 말이 오래 남는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어떤 삶이든 가능하다는 것.
그 자유는 동시에 고통을 수반한다.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니까.
남 탓을 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어떤 사람은 불안을 회피하려고
감정과 행동, 그리고 생각을 통제하려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불안을 수용하고,
그 안에 머무르며
불안 속에 있는 자기 자신과 마주한다.
불안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다.
그래서 불안을 없애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조절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불안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안의 내용을 구체화해야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객관화하게 되면,
불안은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조절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과정을 위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어떤 상태를 걱정하고 있을까?
그 질문에 답을 찾는 시간을 통해
자기에 대한 이해는 깊어지고,
불안은 조금씩 구체화되며 객관화된다.
그 과정에서 자기 회복이 일어난다.
죽음에 이른다는 건
삶이 끝났다는 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채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
불안을 없애려 애쓰기 보다
그 안에 담긴 마음의 소리를 조용히 들어보자.
불안을 수용하는 순간,
우리는 잊고 지냈던 진짜 나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