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가시고 가을이 다가옵니다. 가을이 저물면 이내 추운 겨울이 얼굴을 내밉니다.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마치 계절의 시작과 끝이 눈에 보이듯 명확합니다. 과연 계절은 칼로 자르듯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계절은 자연이 추위와 더위를 오가며 서서히 물드는 과정입니다. 이렇듯 단어를 사용해 어떤 현상을 정의하는 순간, 의미는 명확해질지 몰라도 그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과정을 쉽게 간과하게 됩니다. 한여름 같은 가을날, 흰 눈이 내리는 4월의 봄날이 있는데 말이죠.
늦은 오후, 아이와 산책을 나섰습니다. 가볍게 걷기 위해 나선 길은 늘 그렇듯 놀이터에 다다르자 긴 여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아이와 담소를 나누며 여유롭게 걷는 산책은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겠습니다. 숨바꼭질,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아이의 놀이 루틴에 맞춰 놀다 보니 제 뒤를 따르는 아이가 4명으로 늘었습니다. 누군가 그 광경을 봤다면 놀이터에 5명의 아이가 신나게 놀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을 테지요. 그래도 인원이 늘어나니 쉬어갈 수 있는 틈이 생깁니다.
순간, 너무 오래 놀았다는 생각에 시간을 확인하니 이제 곧 밥 먹을 시간입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가 떠올라 열심히 뛰는 아이를 멈춰 세우고 이야기합니다.
“채원아, 이제 그만 저녁 먹으러 가야 해. 이러다가 해지고 밤 되겠어.” 그러자 아이는 틀렸다는 듯 팔짱을 낀 채 대답합니다. ‘역시 더 논다고 하겠지’라는 생각으로 답을 기다리는데 아이는 뜻밖의 말을 꺼냅니다.
“해지고 밤 되는 게 아니야. 노을 지는 걸 빼먹었잖아.” 아, 노을 지는 걸 빼먹었다니.
해가 지고 밤이 되는 일련의 과정 중,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언제 올려다봤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깨닫습니다.
일련의 현상을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과정을 생략하는 것은 일의 효율성을 높이는 좋은 방법입니다. 또 원인을 찾고 결과를 도출해 내는 데에도 유용하게 쓰입니다. 하지만 효율성에만 치중하면 일의 과정 중에 발견할 수 있는 귀한 것들을 놓치게 됩니다. 느긋함을 기다려주지 않고 뭐든 빨리 이뤄내기를 재촉하는 사회 분위기는 이런 현상을 더욱 부추깁니다. 효율성과 결과 지상주의, 생산성을 제1의 가치로 여기는 기업문화 등. 아름답게 물드는 노을을 잊게 만드는 요소가 주위에 넘쳐납니다.
누구에게나 쉼이 필요합니다. 휴식은 지친 몸을 느슨하고 유연하게 만들어 마음의 여유 공간을 만들어줍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한 단어로 정의되는 개념의 틀에서 벗어나 그 사이사이 존재하는 소중한 것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입니다.
고개를 들어 붉게 물드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러자 비로소 해가 지고 밤이 되는 그 길목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