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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밖의 이름들>

2025년 8월 넷째 주

by all or review
9788965967347.jpg 흐름출판


이 책을 읽는 데 정말 오래 걸렸습니다. 꼼꼼하게 읽고 또 읽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위에서 아래로. 같은 문장을 계속 반복해서 중얼거리기도 했죠.


너무 맞는 말이어서, 착잡해서, 그래서 한 번이라도 더 읽으면 감정이 내려갈까 기대하며 읽고 또 읽었습니다.

피해자는 증명해야 한다. 고통을, 분노를, 두려움을, '그럴 만한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피해의 입증과정은 피해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그렇기에 피해자는 다시 상처받는다. 상처를 조금이라도 흐릿하게 만들기 위해 시작한 일에 다시 상처 입는다.

그 상처의 가장자리에 선 사람이 피해자의 변호사다. 단지 법률 대리인이 아니라, 상처의 동행자여야 하는 이유이다.

무력해질 때가 있다. 변호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을 때에는 더욱 자책하게 된다. 더 잘 방어하지 못한 것 같고, 더 제대로 싸우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안다. 피해자를 위로하는 것은 판결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곁을 지켜주는 사람의 존재도 중요함을. 그 존재가 되어주는 일이 나의 역할이라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

사건 하나가 끝나면 다음 사건이 밀려온다. 기록을 남길 틈도 없이 감정은 덮이고 흘러간다. 하지만 어디에선가 다시금 말을 꺼내야 할 때, 나는 그 감정을 새로 정리한다. 말이 글이 되고, 글이 기억을 부르며, 기억은 나를 다시 나답게 만든다.

나는 변호사로서 법을 다룬다.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집중하는 것은 법 너머의 '사람'이다. 피해자의 존엄, 억눌린 목소리, 침묵 속에 삼켜진 말들. 그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나는 법의 언어가 기록하지 못한 감정을 기억하고자 한다.


최근 제가 하는 고민과 결이 같습니다. 요새 '기사를 통해 보여주어야 할 것은 결국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게 피해자든 가해자든, 정책이든 사건/사고든요.


특히 판결문 너머에 아이가 있을 땐 너무 처참했습니다.

아동학대는 더 이상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한 달에 3.7명의 아동이 학대로 사망한다. 아동학대 사례 중 80% 이상이 가정 내에서 발생하고, 학대 행위자의 85%가 부모다. 가장 보호받고 안전해야 할 공간에서 대부분의 아동학대가 일어난다. 무엇보다 아동학대는 결코 그 순간의 상처로 끝나지 않는다.

아이의 정서와 발달을 뒤흔들고, 오랜 시간이 흐르고도 한 개인의 성장에 영향을 미친다. 성인이 되어도 그때의 흔적이 다시금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오랫동안 아무리 떼어내도 끈질기게 아동학대 피해자를 따라다닌다.


'공소 시효' 문제까지 다다를 땐 (정말이지) 절망적이었습니다. 면죄부는 중세시대에서나 존재했던 부정부패의 역사 아니었던가요.

공소 시효.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법률에 정해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국가가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게 되는 제도이다. 이 제도가 과연 친족 성폭력 범죄에도 필요한 것일까?

공소 시효의 도입 취지는 명확하다. 국가 형별권이 완전하지 않다는 전제 아래, 효율적 수사와 장기적 불안정성 해소를 도모한다는 것.

하지만 현실에서 이 제도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하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가해자는 국가로부터 '처벌 면제'라는 면죄부를 얻는다.


그래서 우리 법은 피해자를 내동댕이 쳐버리는 걸까? 무력한 게 정상인걸까? 이런 질문이 자연스레 뒤따를 때쯤 이 문장을 만납니다. '이름 없는 폭력' '이름을 단 법안'이 천천히 다가가고 있다고. 떠나간 김용균이, 태완이가, 민식이가,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스토킹은 집착이나 괴롭힘, 그리고 구애 과정에서 흔히 있을 법한 일 정도로 가볍게 여겨진 기간이 길었다. 직장 내 괴롭힘 역시 '인사권자의 재량'이나 '조직 문화'라는 이름으로 오랜 시간 방치됐다.

그러나 느린 걸음이지만 법률은 한 걸음씩 이름 없는 폭력에 다가가고 있다.


막 소진됐을 참이었습니다. 모두가 여름휴가를 보내고 하나둘씩 복귀해 하하호호 웃을 때, 전 웃을 수 없었습니다.


막내는 언제나 후순위였고, 더 열심히 일해야 했으며, 괜한 욕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지탱해 낸 그 짧은 시간, 제가 쌓은 모래성은 파도에 휩쓸려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군가를 지키는 일이 자신을 잃는 일이 되면 안 된다. 소진된 잔해 속에는 분노, 자책, 슬픔, 피로, 침묵이 뒤엉켜 있다.

오늘도 강의에서 말했다. "절대 여러분 스스로를 소진하지 마세요" 이 말은 단순한 클로징 멘트가 아니다. 하나의 다짐이자 선언이다.

이 일을 오래 지속하기 위해 우리는 소진을 두려워하기보다 소진을 읽어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멈출 수 있고, 돌아설 수 있고, 다시 설 수 있다.


소진을 읽어내는 힘, '소진 문해력'이랄까요. 그 문해력을 키울 수 있었던 힘은 진심으로 법정 밖의 이름을 불러주는 변호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변호사가 불러내는 이름들에서 괜한 오지랖을 부려 힘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변호사를 법정 한가운데서 또박또박 말하는 사람으로 떠올린다. 물론 그런 일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내 진짜 일터는 그 바깥이다. 변호사의 시간은 대부분 법정 밖에 존재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이를테면 범죄 피해자들, 그들을 돕는 이들, 피해자를 위한 법과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법정 밖에 있기 때문이다.

내게 법정 밖이란 단순한 '공간의 외부'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곳은 누군가의 고통이 시작되고, 갈등이 쌓이며, 해결이 절실한 현장이다. 그러니 결국 변호사에게 필요한 일은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여러분들도 법정 밖의 이름들을 함께 외치며 소진 문해력을 키워보시길. 괜한 오지랖으로 평양냉면 같은 잔잔한 감동에 빠져보시길 바랍니다.

이 책엔 특별한 정의도, 대단한 결말도 없으며, '사이다'도 없다.

대신 나는 이 책을 통해 피해자가 법정 안팎에서 겪는 침묵과 기다림, 그리고 존엄을 되찾기 위한 분투를 당신과 나누고 싶다.

정확히는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기록이, 피해자의 말에 법률과 제도가 응답하기까지의 거리감을 이해하고, 그 간극을 줄이는 일에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빌린 그들의 목소리가 아직은 너무 멀고 작게 들릴지라도, 언젠가는 가닿기를 바란다.

이름을 획득한 우리의 이야기는, 다시 천천히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겠죠?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제목 : <법정 밖의 이름들:법 테두리 바깥의 정의를 찾아서>

저자 : 서혜진

출판 : 흐름출판

발행 : 2025.08.01.

랭킹 : 인문 부문 104위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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