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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에 대하여>

2025년 9월 셋째 주

by all or review
김영사



책을 쓰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고된 작업입니다. 아니, 어쩌면 '생각만큼'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죠. 어느 언론사가 입사 6개월 만에 책을 쓰라고 시키겠습니까.


그래서 책 한 권 한 권의 소중함을 대충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문형배 전 재판관이 쓴 '호의에 대하여' 작가의 말엔 '평생 책 한 권 내는 것이 꿈이었다'고 써 있습니다.

평생 책 한 권 내는 것을 꿈꾸었던 저에게는 이 책의 발간이 큰 의미가 있음이 명백하지만, 여러분께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애썼던 어느 판사의 기록입니다.


대단한 업적에 걸맞는 대단한 기대로 책을 펼치시면 아마 실망하실 겁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 전 재판관의 교훈이나 법철학이 가득 녹아있는 책은 아니니까요.


예민한 감각으로 숨어있는 교훈을 쏙쏙 뽑아내야 합니다. 제가 발견한 교훈은 '법을 알자'입니다.


착한 사람을 일컬어 '법 없이 살 사람'이라고들 한다. 법의 강제 없이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사람이란 뜻이리라. 나는 법이 어떠하다고 정의할 만큼 경력도 풍부하지도 않고 타고난 재주도 없지만, 1983년 법학을 전공한 이래 지금까지 18년을 법과 함께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착한 사람일수록 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착하다(고 생각한다)면, 법을 알아야 합니다. 나쁜 사람이 법을 악용하지 않도록 막기 위한 '예방적 차원'에서 법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법을 알 때 비로소,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 수 있습니다.


판사로서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착한 사람은 법을 모르고, 법을 아는 사람은 착하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사건일수록 해결이 어렵고, 착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궁리를 해보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착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착하기를 요구할 것인가? 불가능은 아니지만 어려울 것이다. 남는 방법은 착한 사람이 법을 아는 것이다. 그 길만이 법이 나쁜 사람을 지켜주는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때론 법이 상식과 어긋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법감정과 냉혹한 현실 사이엔 분명한 온도차가 있죠. 그 온도차에서 이슬이 맺히듯, 피해자들의 피눈물이 맺힙니다. 그러나 '무지'한 피해는 고스란히 무지막지하게 되돌아오죠. 저도 법을 몰라 넋두리를 꽤 오래 했습니다.

간혹 법정에서 "법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법을 떠나 상식적으로 상대방 주장은 말이 안 됩니다"라는 말을 듣는데, 부질없는 말입니다. 법을 아는 것도 상식을 넓히고 힘을 기르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사전에 법을 제대로 알고 대처하는 것만이 넋두리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특히 착한 사람들은.


오랜 넋두리 끝에 약간의 경험을 얻었습니다. 세 명의 판사를 만나기까지 지난했던 시간들이 아직도 악몽처럼 스쳐갑니다. 제 인생에 관여했던 사람이 있듯, 저도 누군가에겐 극적인 순간에 관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단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판사란 타인의 인생에, 특히 극적인 순간에 관여하는 사람이다. 분쟁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인생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 없다면 자칫 그들 인생에 커다란 짐을 지우는 오판을 할지도 모른다. 시간이 갈수록 판사란 직업이 두렵다.


'자살'을 반복하면 '살자'가 된다는 이야기는 한때 유행했었다는 걸 아시나요. 감동적인 판사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교과서에서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핵심은 사실 앞이 아니라 뒤에 있습니다. 당신이 살아야 할 이유는 단순히 '말'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라는 것이었죠. 저는 여전히 사람이 보입니다.

"지금 자살을 생각하시고 계신 분이 있다면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십시오. '자살자살자살...' 이렇게 열 번만 외치면 어느 순간 '살자살자 살자...'로 들릴 것입니다. 실패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자살에 실패하면 사는 것입니다. 당신이 떠나고 나면 당신을 붙잡지 못한 미안함에 며칠을 울어야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보고 싶어 또 울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자살은 당신이 떠난 후 남은 이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상처입니다. 어머니와 함께한 해외여행에서 심장 마비로 돌아가신 분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날 트위터에 자살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에게 남긴 글이다.


이번 주도 살아봅시다. 저도 잘 살아보겠습니다. 착하게, 법을 알면서.



제목 : <호의에 대하여: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가>

저자 : 문형배

출판 : 김영사

발행 : 2025.08.28.

랭킹 : 시/에세이 부문 1위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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