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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Oct 23. 2021

귀신이 하는 말

치매 증세가 있는 엄마와 가끔 차로 나들이를 하는 이유는 대화에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에는 흘려듣는 것도 엄마와 단 둘이 데이트를 하면 귀가 쫑긋해지며 새겨듣게 됩니다. 엄마의 옛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쏠쏠하거든요. 얘기를 듣다보면 엄마는 단기기억에 장애가 있을 뿐 오래전의 일은 놀랍도록 선연히 기억하고 있는 걸 알게 됩니다. 

가다보니 어느덧 하동 섬진강 부근이었습니다.

엄마는 차에 타면 ‘호시다’라고 말합니다. 엄마는 차타는 재미가 쏠쏠한 모양인가 봅니다.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 노래를 흥얼거리고 엄마는 수다쟁이처럼 중얼중얼 재잘거립니다.  

차 안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중간중간 빠지지 않는 엄마의 똑같은 멘트는 지겹기도 합니다. 그 멘트는 이렇죠. 

“애야, 존니래 그만 가자, 차 기름값 들어싼다. 에지간히 그만 가자, 에지간히!”

나는 “아휴, 그 소리 좀 그만 하셔요! 기름 얼마 안 닳아져요.”라고 짜증 섞인 응수를 하는데 엄마의 그 잔소리는 드라이브 내내 계속됩니다. 나는 일부러 노래를 크게 부릅니다. 애써 엄마의 잔소리에 선을 긋기 위해서죠. 

가고 오는 도중 여기가 어디 어디라고 설명해주고 옥곡을 지날 때는 여기가 광양 옥곡장이라고 하니, 엄마는 대뜸 “광양사람 앉은 자리는 풀도 안 난단다. 얼마나 독한지.”라고 말합니다. 

나는 그 소리에 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합니다. 광양댁인 우리 할머니도 그랬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청상과부인 할머니 밑에서 얼마나 매운 시집살이를 했던가...   

또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귀를 기울이는데,  

“막내아들이 호시 태워주고 구경을 많이 시켜줘서 나중에 죽으면 귀신이 딱 보고 이 사람은 차도 많이 타고 구경을 많이 댕겼구나 하것다.”

나는 ‘또 그 말씀!’하고 머쓱해하니 엄마는 “저승에 가면 귀신이 세상구경 많이 해봤냐 라고 물어본단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또 한 번 피식 웃습니다. 


하동 섬진강 붉은 다리를 건너는데, 엄마가 “여기가 다리재 잉? 언젠가 다리 넘었던 거 같다. 저 다리 넘었어.”라고 아는 체를 합니다. 스쳐가는 창밖의 낯익은 풍경을 보시더니 기억이 새삼 새로우신가 봅니다. 이럴 때 보면 엄마는 아주 멀쩡하신 분처럼 보입니다. 내가 “엄마 기억력이 좋네!” 라고 칭찬해주니 엄마는 헤헤 웃습니다. 

서녘 하늘에 땅거미가 지고 해가 비를 머금은 것을 보시더니 엄마는 뜬금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해는 여자고 달은 남자고.”

“엥, 그게 무슨 말이예요?” 

“해는 여자란다. 밤에 다니면 무섭다고 해서 여자는 해가 되고 남자는 안 무서운께 밤에 다닌다고 해서 달이 되고, 옛말에 그런 말이 있단다.”

“아, 예...” 

나는 엄마의 전설 같은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또 얼마간 가는데, 엄마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불쑥 또 말합니다.

“시어머니가 전에는 시아버지랑 밥도 해놨는디 요년이 밥도 안해놓는다고 하것다.”라고 말하여 내가 큭큭 웃으니 엄마도 따라 웃습니다.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뒤에는 엄마는 교회를 다니셨고 또 코로나가 창궐하여 가족이 다 같이 모이기도 힘들어 작년에는 제사도 그냥 넘어갔었던 일이 생각났었다 봅니다.

“요즘은 교회 다니고 그렁께 제사도 안 지내고 안 그러냐. 그래도 밥을 한 그릇 해놓을 것인디 무담시 교회를 다녔는가 싶다. 기억이 깜박깜박하여 제사 날짜도 모르고 넘어가고.”

엄마는 종갓집 며느리로서 제 도리를 못한 양 죄송스럽고 아쉬운 심경을 토로합니다.

“아, 그러겠네요. 할머니가 배고프다고 머라 하겠는네요.”라고 살짝 말을 받쳐주니 엄마는 “그렁께, 그거 참!”하며 재차 아쉬운 듯 혀를 찹니다. 


그렇게 엄마와 난 차를 타고 다니며 빛바랜 낡은 상자에서 오래된 물건을 하나씩 꺼내듯 대화를 합니다. 옛날 일을 회고하며 슬쩍슬쩍 비치는 엄마의 은근한 속내도 들여다볼 수 있어 좋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대화가 오고가리오만은, 나의 기억에 엄마의 한마디 한 마디가 오랫동안 오롯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엄마처럼 늙어 내 자식이 나의 넋두리를 가만가만 들어줄 때까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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