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마후문
"정성으로 무장된 노력은
어떤 난관도 뚫고 나갈 수 있다."
제갈량
쉽게 가려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욕심이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느꼈던 나의 학벌.
그랬을까?
그 부족함의 갭을 매우기 위해
나는 노력을 한 것일까?
나를 갈아 넣으려고 한 것일까?
처음 내가 학원 강사로 시작한 곳은
경기도 평촌이었다.
나를 알리기 위해 열심히 이력서를 돌렸다.
초보임에도 나를 채용해 준 곳이 있어서 그렇게
나의 강사 생활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아쉬움이 느껴졌고,
조금 더 아이들이 많은 곳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가까운 평촌에서 분당까지
이력서를 돌렸다.
아니, 사실 이력서를 들고 찾아간 곳도 있었다.
그렇게 인연이 닿아서 나는 분당에서 꽤 안정적인 중고등 전문 입시학원의 강사가 되었다.
그곳에서 지금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아는 분들도 뵈었다.
혹시 궁금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강사 채용의 1단계는 이력서.
2단계는 시강이다.
시강은 학원 관계자분들 앞에서 강의하는 것이다.
시강도 2종류가 있다.
범위를 사전에 알려주고 준비해오게 하는 학원,
시강 자리에서 알려주는 학원...
가장 떨리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분들은 안다.
그 사람의 강사로서의 지적인 부분만을 보는 것이 아니기에, 단 3분의 시간으로도 알 수 있다.
기본적인 강의력, 강사로서의 마음가짐... 등.
그렇게 2번째 학원에서 어느 정도 근무를 한 이후,
좋은 선생님과 연이 닿아서 서울로 가서 고등학생과 재수생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 학원은 강남 3구는 아니었지만,
나름 지역에서는 아주 탄탄하고 안정된
규모가 큰 학원이었다.
종합반과 단과반이 있었는데,
나는 종합반의 강사로 일하였다.
그 학원에서는 시험 전후로 설문조사를 하였다.
선생님의 강의에 대한 만족도 조사였고,
무기명의 방식이었다.
그 결과지를 받아볼 때면 늘 설렜고, 또 떨렸다.
만족도는 조금씩 차이가 났지만 80%대로 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95% 내외였다.
그런 설문 결과를 받아보면,
'그래. 나는 최선을 다했어'라는 마음과
한편으로는 '그럼 나머지 5%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하며
나의 강의 방식에 대해서 개선해야 할 것은 없는지
또는 나의 실수로 아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다.
무기명이기에 정말로 누군지 알 수 없다.
그러고는 결심한다.
5%의 부족함을 채워서 다음에는 꼭
100%를 받아보자.
그렇게 더 열심히 강의 준비를 하였고,
아이들과 학부모님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하였다.
사실 사회 과목 강사에게는 최상위권 반 아이들의 담임을 맡기지 않는다.
살짝 자랑이지만, 나는 워낙 아이들을 관리를 잘해서 흔히 말하는 입시에서 겉절이 과목을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그 아이들의 담임도 되었다.
담임의 주 역할은 담당 과목을 가르치는 것 이외에도, 학생상담, 학부모 상담, 그리고 등록이었다.
참고로 내가 근무했던 학원은 등록수가 줄어든다고 페이가 줄거나 하는 곳은 아니었다.
페이는 약간의 담임수당과 함께 오로지 내가 근무한 수업 시간당이 기준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그 시간이 즐거웠다.
그 마음으로 관계에 있어서도 정성을 쏟았다.
강의도, 상담도, 등록도....
그 과정에서 나의 학생관리는 다른 선생님들께 벤치마킹의 모범이 되었다.
덕분일까?
사실 고등부 강사로 여자 강사는 많지가 않다.
또한 나보다도 나이 많으신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리고,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의 실력으로 인정받아,
실력이 바로 힘이 되는 그 세계에서
나는 늘 당당하게 나의 목소리를 높이고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5%를 채워서 100%가 되고 싶었다.
100%를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98%가 최선의 결과였다.
그런 과정에서 어느 날 강사를 관리하시는 위의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말들 들었다.
"다 좋은데, 학벌이 살짝 아쉬워."
그 말 때문이었을까?
나는 보여주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꼭 필요한 존재임을 보여주고자 더 열심히 하였다.
아니 나 자신을 갈아 넣었다고 해야 할까?
심장 수술을 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결근을 한 적이 없다.
밤늦게 강의가 끝나고
아파서 응급실을 다년 온 다음 날도 일하러 갔다.
그때는 그것이 진정한 프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고,
동료 선생님들도 다 좋은 분이셨고,
심지어 학벌이 아쉽다고 말씀해 주신 분도 좋은 분이셨다. 그저 그분은 현실을 나에게 말씀해 주신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를 갈아 넣었던 그 시간이
고통의 시간은 아니었다.
그저 먹는 시간이 조금 부족하고,
잠자는 시간이 부족했을 뿐이었다.
오히려 나를 성장시켜 주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성장의 시간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일까? 나에게 학벌 말씀을 하셨던 그분의 소개로 노량진으로 가게 되었다.
노량진...
모든 재수생이 모이는 곳,
부담이 되었다.
특히 노량진은 다른 어떤 입시 학원보다도
여자 강사가 드문 곳이었다.
그래서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1시간의 수업을 위해 최소 4~5시간을 준비하였다.
그 아이들은 절박한 아이들이다.
나의 어설픈 실력으로 그 절박한 아이들의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질문을 수십 가지 예상하며, 단 하나의 질문도 허투루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게 수업 준비를 하였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수면 시간도 밥 먹는 시간도 부족했지만, 그런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곳은 주차가 굉장히 복잡하고 힘들어서,
집에서 왕복 3시간, 버스를 타고 갔다.
거리가 아주 멀지는 않았지만 교통체증으로 심각하게 정체되는 구간이 많았다.
그러다 어느 날,
속이 너무 안 좋았다.
그 정체구간이 되면 어김없이 신물이 올라오며,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잘못된 식습관과 수면 습관으로
만성 위염이 다시 도진 것이었다.
그런 시간이 반복되다 보니,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러고 있나라는
회의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마침,
더 늦기 전에 아이를 가져야겠다는 마음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쉽게 가려하지 않았던 것,
그것은 나의 욕심이고 자만이었던 것임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알고 있다.
문제는 나였다는 사실을...
그런데 문제는
'나였다'가 아니라
'나이다'라는 점이다.
지금도 그러하다.
이것은 기질인지...
욕심인지...
충족되지 못한 것에 대한 부질없는 열망인지...
돌아보고 돌아보아도
알고 있는데, 아는데,
달리 어찌할 수 없는 나를 만난다.
하지만,
씨앗을 심는 마음으로 무엇이든지 하려고 한다.
어떻게 자랄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바라본다.
먼 훗날,
아....
이 모든 과정이 지금의 순간을 위해서였구나! 하며
답을 찾을 수 있는 그날을 고대하며,
오늘도 씨앗을 심는다.
단 하나의 씨앗도 허투루의 마음으로 심지 않는다.
정성으로 무장된 노력은
그 어떤 난관도 뚫고 나갈 수 있다는
정성의 힘을 믿으며 오늘도 씨앗을 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