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마후문
흔들린다.
나의 확고한 의지와 생각이
나이 든 엄마를 만나면 흔들린다.
늘 그랬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흔히 말하는 가방끈이 짧은 것이 아니라
아예 그 끈조차도 잡아보지 못했던 나의 엄마,
그런 엄마가 나에게 말한다.
너무 애달파하지 마라.
엄마의 눈에는 무엇이 그리 애달프게 보였을까?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키워놓은 딸이
대단한 삶을 살지 않아서 애달픈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그렇게 애달파하며 키운 딸이
자신보다는 아이를 먼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 애달픈 것일까?
어제였다.
아이에게 실망하고 나무라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엄마가 말씀하셨다.
애달파하지 마라.
살아보니 별거 없더라.
그러니 부디
자식에게 애달파하지 마라.
자식 때문에 애달파하지 마라.
그랬다.
나는 애달파하고 있다.
문득문득
답답할 때면
내 마음같이 풀리지 않을 때는
허공에다
어리석은 질문,
부질없는 질문을 던지곤 하였다.
우리 엄마가
생계에만 힘써야 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나의 삶을 어떠했을까?
우리 엄마가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보다,
나의 교육에 조금 관심을 가져주었더라면
나의 삶이 달라지지는 않았을까?
나는 부러웠다.
엄마에게 잔소리 듣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엄마가 하는 잔소리는
아끼는 것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밝으니 전등 꺼라,
티브이를 보지 않으면 꺼라.
전기세 나간다.
냉장고 문은 꼭 필요할 때만 열어라.
깜빡하고 온수 사용 후 보일러를 끄지 않은 날은
화를 내셨다.
얼마나 답답하셨는지,
보일러 조절기 옆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붙여놓으셨다.
"사용 후 바로 보일러 온수 끄라!"
물론 한두 번이 아니니 그리하셨을 것이다.
그런 잔소리가 싫었던 것은 아니다.
틀린 말이 아니니...
내가 원했던 것은 나의 공부에 관한 잔소리였다.
한 번도 나의 공부와 관련해서 물으신 적이 없다.
오죽하면 부러웠다.
어느 친구는 엄마가 공부하도록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문 앞에 지키고 있는다는데,
우리 엄마는 왜 나에게 공부에 관해서는
일언반구의 말도 하지 않으실까?
그랬다.
나는 그런 공부 잔소리가 듣고 싶었고,
아끼라는 말 대신에
공부해라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면
나의 삶이 조금은 더 다르지 않았을까?
스스로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하고는 하였다.
알고 있다.
이 어리석은 질문은
지나온 나의
학창 시절의 나 자신에 대한 애달프음이다.
그럼에도
학업에 큰 뜻을 이루어낸 이들도 많으니 말이다.
나는 나에 대한 애달픔을
아이에게 표현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 자신보다는 더 많은 정성을 들여 키운 아이가
대단한 삶을 살지 못할까 봐 애달픈 것이다.
부의 계층 간의 사다리에서
한 계단 올라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3세대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마 모든 부모는 자식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나의 바람이
자식의 진정한 행복을 바라서라기보다는
어쩌면
어리석은 나의 지난 시절에 대한
애달픔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나의 자녀에 대한 교육관은
다른 부모들과는 조금은 다른 방향이다.
어쩌면 유별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의 교육관을 지켜나가고 싶은데,
엄마를 만나면 흔들린다.
엄마가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서울로 대학을 보냈더라면 어땠을까?
가끔은 후회가 되더라.
그래도 너무 애달파하지 마라.
살아보니 별거 없더라.
그저 건강하고,
아이보다는 너의 삶에 더 정성을 쏟아라."
그리고 아이를 불러 말씀하셨다.
"소중한 내 딸, 힘들게 하지 마라."
자식에게 애달파하지 말라는 엄마,
자식 때문에 애달파하지 말라는 엄마는
아직도 내가 애달픈가 보다.
"부디 애달파하지 마라.
살아보니 별거 없더라."
소중한 나의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