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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년교생 Apr 18. 2023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당탕탕 첫 수학여행

첫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인솔교사는 에버랜드에 특이한 입장권을 들고 들어간다.


코로나와 함께 교직생활을 시작해서인지 일을 시작하고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다. 같은 일 년들 사이에도 워낙 많은 일들이 있었고, 특히나 한 번 반에 코로나가 퍼졌다 싶으면 주말 중에도 불려 나가서 코를 찌르고 오곤 했다. 시간은 상대적이라고 하지 않던가. 독특한 경험이 많을수록 체감되는 시간의 길이는 길어졌다. 길어지는 시간만큼 나는 겉늙어갔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곳곳에서 다시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2020년의 그때에 비하면 제법 누그러졌다. 내 교직의 햇수가 올해로 4년 차이니 코로나와도 3년을 보낸 셈이다. 대학에서 일하는 후배들은 학생들이 윗대의 축제나 학과 행사를 본 적이 없어 온갖 전통이 끊겼다고 한다. 내가 새내기일 때, 선배들은 수십 년을 이어온 우리 학과의 전통이라며 온갖 과 행사들을 진두지휘했었다. 그랬던 전통이 끊겼다니, 지난 3년은 그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시간이었다.


누그러진 코로나와 함께, 학교에서도 온갖 대외활동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당장의 수학여행이 그랬고 1학년에서는 수련회(물론, 모종의 이유로 미뤄졌지만), 3학년에서는 단체로 졸업사진을 찍기 위해 가까운 근린공원으로 장소를 물색한다고 한다. 한철 누그러진 역병들 사이에서 우리도 조심스레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경험이 꽤 있는 선생님들은 출발 전부터 지레 질려하는 표정들이었다. 숙소를 지키고 감시하는 지긋지긋한 일과들에서부터 매번 이동 때마다 인원점검을 하고,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일들. 그리고 그 많은 주의에도 꿋꿋하게 제멋대로 하는 학생들. 그 모든 것들이 스트레스로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그래도 수학여행은 '여행'이라며 제법 들뜬 마음으로 다녀왔다. 즐거웠냐고? 즐겁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시 가고 싶진 않을 만큼 녹초가 되어 돌아왔다.


한국민속촌을 처음 가봤다. 특목고로 가면 외국도 간다던데...


여행 중에 한 반의 학생이 다친 일이 있었다. 우리가 숙소로 잡은 호텔의 엘리베이터 수가 부족했던 관계로(사실 부족하다기 보단, 학생이 지나치게 많은 탓이다.)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곤 했는데, 아침을 먹고도 허기가 풀리지 않아 편의점을 가려던 녀석이 계단에서 넘어져 크게 부상을 입었다. 보통 다치면 제 반과 담임을 찾기 마련인데, 이 녀석은 하필 제 반의 지수를 잘못 말했고, 애꿎은 내가 새벽에 뛰쳐 내려갔다.


때마침 여차저차 다른 반에서도 각종 사고가 일어나는 중이었다. 해당 학생의 담임 선생님이 학생을 병원으로 인솔했어야 했으나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우리 반은 학년부장 선생님이 맡아주시기로 하고 학생을 데리고 상급병원 두어 곳을 돌아서 겨우 찢어진 곳을 기웠다.


병원 치료가 끝날 즈음 학년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학부모와 연락이 되었고, 학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치료를 이어가고 싶다는 것. 관리자는 학부모가 직접 숙소까지 올라오겠다는 것을 만류하고 중간인 대전에서 만나서 학생을 인계하자고 제안했다. 그 시간, 나는 진료가 끝나고 학생에게 밥을 사 먹이고 있던 차였고, 전화로 이 내용을 전해 들은 후 급히 택시를 잡아 숙소로 돌아가서 학생을 넘겼다. 이윽고 45인승 버스 하나 학년부장과 보건선생님, 담임선생님, 그리고 학생이 탔다. 기사를 포함하여 5인 만을 실은 45인승 버스는 대전을 향해 내달렸다. 왕복 200km에 가까운 길을 다녀오고 나니 저녁 무렵이었다.

숙소 근처의 정경. 미세먼지 덕분에 하늘 색감이 예술이었다.


그날, 한 학생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손발을 맞추었다. 인솔교사 간의 소통과 협업은 물론이었고, 비번임에도 그 먼 길을 내달려준 기사님, 종합 병원의 진료의뢰서가 없음에도 학생이라는 이유로 먼저 진료를 당겨 봐준 의사 선생님 등 많은 사람들의 우연 같은 노력이 더해져 한 건의 사고를 무사히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모든 일들을 당하고 있을 때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는데, 제 일이 다 끝나고 저녁 식사 자리에 둘러앉아 있으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다들 어두운 표정으로 밝은 격려를 건네며 조용히 숟가락을 들었다.


수학여행의 '수학'이 '배움'을 뜻한다고 한다. 삼백여명의 학생들이 저마다의 배움을 안고 돌아갔듯이 나는 이 작은(?) 소동을 통해 협업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달았다. 어느 일 하나도 내 힘만으로는 되는 것이 없었다.


역사박물관 내의 시대별 공익광고 모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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