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스혜영 Dec 28. 2021

'제브라 크로싱'의 원칙

.

자. 퀴즈 나갑니다.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좌우 눈치 없이 길을 건널 수 있다.

이게 있으니까. 10살 된 딸이 혼자 학교를 가도 안심이 된다.

차별이란 없다. 모든 차량은 무조건 멈춰야 한다. 

신호등은 없다. 기다란 빨대 위로 노란 경고등 하나 달려 있다.


정답을 맞혔나요? 영국에서는 이 것을 '제브라 크로싱'이라고 불러요.(얼룩말 횡단보도)

 

영국에서는 얼룩말 횡단보도 말고도 펠리컨, 퍼핀 횡단보도처럼 동물 이름을 교통 신호에 붙이곤 한다. 한국에서 매번 봤던 일반 횡단보도랑 생김새는 같아도 '제브라 크로싱'이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친근함이 복잡한 도시를 한 뼘 여유 있게 만들어 준다. 우리 마을처럼 도로가 크지 않은 곳에서 제브라 크로싱을 쉽게 볼 수 있다. 내 발꿈치가 제브라 크로싱에 닿는 순간 저 멀리서부터 쌩하고 달리던 차들이 속도를 늦추고 멈춰 선다. 뒤에 따라오던 차들도 곧이어 멈춘다. 양 옆으로 세 네대의 차가 멈춰 설 때면 빨간 카펫이 짜잔 하고 펼쳐지는 기분이다. 나는 얼룩말에 올라탄 사람처럼 여유 있게 주변을 돌아보고 세워준 차들에게 고맙다고 한 손을 들어 인사한다. 운전사도 나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나눈다.


제브라 크로싱 안에 있을 때만큼은 어느 누구나 우선순위가 된다. 

곰젤리를 사러 상점에 가는 일곱 살 어린아이부터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나 우유 한 통을 가슴에 앉고 휠체어를 탄 아저씨.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일하러 가는 아줌마나 스쿠터를 가지고 초등학교를 가는 할아버지까지 모두가 우선순위가 된다. 깜박거리며 빨리 걸으라고 재촉하는 주황 신호등도 없으니 자기만의 속도로 걸어가면 된다. 


선불을 내지 않으면 어떤 치료도 할 수 없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차 사고를 목격한 적이 있었다. 10년 전이었나. 중국이었다. 버스 위로 한 여자의 머리가 치솟아 올랐다가 도로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꽈당' 떨어지는 소리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급하게 달렸다. 희끗희끗한 흰머리 사이로 흐르는 피가 귀 뒤로 뚝뚝 떨어졌다. 다행히 가방 안을 뒤져보니 휴지가 있었다. 휴지를 몇 겹 뭉쳐서 그녀의 머리 위에 갖다 댔다. 괜찮냐고 물었더니 눈을 한번 깜박이고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할머니가 탔던 오토바이는 괴물한테 물린 것처럼 앞머리가 완전히 부서졌지만 반대편에서 들어오던 택시기사와 택시는 멀쩡해 보였다. 사고 난 지점에서 큰 병원까지 고작 10분이면 걸을 수 있는 거리였지만 할머니의 상태로는 발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어려워 보였다. 양쪽 차선으로 차들은 계속 지나쳤고 도로 중앙에 쓰러진 할머니만 두고 차마 집에 갈 수가 없었다. 머리 위에 얹은 흰 휴지 뭉치가 빨갛게 물들고 있을 동안 차 안에 있던 택시 기사는 바쁘게 전화만 돌렸다. 삼십 분 기다렸을까. 마침내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나는 보호자가 아니었지만 동의를 얻고 할머니와 같이 병원으로 갔다.


그때만 해도 중국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아서 병원 절차를 전혀 알지 못했었다. 응급실에 도착한 지 20분이 지났는데 아무런 치료도 없었다. 새 빨개진 휴지 뭉치를 버리고 새 휴지 뭉치를 할머니한테 건네는데 분통이 터졌다. 왜 진료를 하지 않는 겁니까. 울화 섞인 목소리로 간호사 같은 옷을 입은 분에게 물었다. 그때, 생각지도 못했던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선불을 내지 않으면 어떤 치료도 할 수 없어요"


'선불'이라는 말은 응급이나 골든타임 같이 긴박한 응급실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나중에 도착한 할머니의 아들이 돈을 내고 나서야 할머니가 누웠던 침대는 수술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할머니에게 손을 흔들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었다. 제브라 크로싱의 원칙이 절실히 필요한 곳에서도 빨간 카펫을 팍팍 깔아주지 않는다는 게 현실이라는 걸 뼈저리 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너는 지켰니? 제브라 크로싱의 원칙을.'   


운전을 하다가 제브라 크로싱이 눈앞에 보이면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그 사람이 길을 건널지 말건지. 주의 깊게 살피게 된다. 어느 누군가가 발을 내딛는 순간, 덜덜덜 트랙터를 몰고 가는 농부나 세련된 벤츠를 몰고 가는 억만장자라도 무조건 멈춰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근데 솔직히 제브라 크로싱을 못 보고 씽 지나칠 때가 있었다. 정말 못 봤다. 그러면 더더더 조심하게 된다.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지키는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면 '제브라크로싱의 원칙', 이런 게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어쩌면 지켜야 할 교통신호뿐만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며 부딪히는 매일의 삶에서도 이런 원칙이 적용되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내 마음에게 먼저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너는 지켰니? 제브라 크로싱의 원칙을.'   


우리 동네 '제브라 크로싱'




이전 02화 이민 온 씨앗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