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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스혜영 Feb 14. 2022

노인은 원숭이가 아니라 기린이 아닐까.

솔제니친의 우화

화요일마다 팬케익이 배달된다. 마치 기계에서 찍어 내린 것처럼 똑같은 모양에 완벽한 동그라미, 잼을 발라서 둘둘 말면 두세 입 물어 먹기 적당한 크기다. 커피와 함께 먹으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버린다. 우리가 집에 없는 날에는 현관문 걸이에 걸려 있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만난 우리 아이들 손에 쥐어 주기도 한다. 한 번은 내가 거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 갑자기 현관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팬케익이 휘 날아왔다. 

'어, 화요일이구나.' 

앤 할머니는 화요일마다 아침 식사로 팬케익을 드신다. 본인이 드시던 팬케익의 양을 더 늘리기 시작한 때는 유일하게 피부색이 다른 우리 가족이 이 마을로 이사 온 후부터다.

"낯선 땅에서 고생이 많아" 

6개의 팬케익이 들어 있는 봉지를 들고 우리 집을 찾아온 첫날, 앤 할머니가 말했다. 


처음 스코틀랜드로 이사 왔을 때 코로나가 한창이었다. 상점을 갈 때도 2미터 간격을 지켜야 했다.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드물고 아이들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처럼 조용했다. 일상의 거리 두기는 보이지 않았던 마음의 거리까지 함께 멀어지는 듯했다. 앤 할머니의 팬케익은 삭막하게 멀어진 내 마음의 거리를 당겨주는 친절한 어깨동무 같았다. 

사람이 태어나 25년은 인간다운 운명을 살고, 
다음 25년은 말처럼 열심히 일을 하며 살고, 
다음 25년은 이미 나이가 50대가 되었으니 마음은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아 개처럼 짖으며 살고 
남은 생은 원숭이처럼 다른 사람의 구경거리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솔제니친의 [암병동] 중에서-


솔제니친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러시아의 극작가이면서 역사가이기도 하다. 그의 우화는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에서 원숭이가 자꾸 맘에 걸린다. 속담에 '원숭이 이 잡아먹듯'이라는 말이 있다. 실지로 이를 잡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원숭이처럼 무슨 일을 하는 시늉을 낼 때 쓰는 말이다. '원숭이 똥구멍같이 말갛다'라는 속담은 몹시 보잘것없는 것을 비유할 때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면 우리가 흔히 쓰는 속담으로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가 있다. 아무리 익숙할지라도 누구나 실수할 때가 있다는 비유에서 나왔다. 어째 원숭이와 관련된 속담에는 괜찮은 것이 하나도 없다. 뭐 하는 척을 한다거나 보잘것이 없고 실수만 하는 노년의 삶이 우스갯거리가 된다는 솔제니친의 말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다. 물론 원숭이 같은류의 노인이 존재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나도 그런류를 만나본 적이 있으니까.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의 우화에 손을 대는 게 실례일 수 있겠지만 나라면, 마지막 25세의 노인을  원숭이에서 기린으로 바꾸고 싶다. 


나이가 든다는 건 기린같이 되어 가는 것이다. 


기린처럼 인생의 깊이가 높이 쌓여갈수록 그들만의 세계에서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내 눈높이에서 가려진 나무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고 돌부리에 넘어져서 울고 불며 야단을 피울 때도 있지만 그들은 저 멀리까지 내다보는 눈이 있다. 


"인공호흡기를 쓰고 싶지 않습니다. 난 이미 좋은 삶을 살았으니까요. 더 젊은 환자를 구해주세요."


코로나 때문에 병원 침대와 산소호흡기가 한창 부족할 그때에 90세의 벨기에 수잔 할머니가 한 말이다. 이탈리아의 돈 주세페 베라르델리 신부(72세)도 자신의 산소호흡기를 젊은이에게 양보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들은 현재에 급급하기보다는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을 만큼 저 멀리의 미래까지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최근 동물원에 갔을 때 기린에 대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기린의 혈압은 사람의 두 배보다도 높다고 한다. 그만큼 심장의 펌프질이 강하기 때문에 긴 목을 지나 기린의 머리까지 피가 차고 올라갈 수 있단다. 이 설명을 듣고 있자니 기린이 노인과 가깝다는 내 말에 힘을 실어주는 기분이었다. 물리적인 힘과 마음의 힘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살면서 뜨겁도록 아껴주는 힘이 넘쳐서 더 많은 이들에게 그 마음을 흘러 보낼 수 있는 사람. 나는 그들을 노인이라고 부르고 싶다. 조롱거리가 아닌 존경거리가 되는 사람들.   


앤 할머니가 이번에 팔순이 되셨다. 할머니의 집은 들어가기 전부터 무지개 꽃들이 한가득이다. 힘이 드실 텐데도 잡초를 뽑을 때면 잔디 위로 천을 깔고 그 위로 무릎을 꿇는다. 봄이 되면 부지런하게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또 잡초를 뽑는다. 


"할머니는 꽃 가꾸기를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꽃 들이 이쁘잖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좋은 하루 보내라고 인사도 하고."


나는 꽃보다 야채 키우는 걸 좋아한다. 꽃은 예쁘지만 생산적이지 못하고 자리 낭비라고 생각될 때가 종종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꽃을 키운다는 할머니의 말은 뜻밖의 대답이었다. 오슬오슬 아침에 불어오는 바람이 차가운 3월이 왔다. 아들 학교를 가려면 할머니 앞마당을 항상 지나쳤다. 앤 할머니의 앞마당에는 벌써부터 노란 꽃들이 봄이 왔다고 서로서로 머리를 맞대며 살랑거린다. 그럴 때마다 노란 봄꽃이 좋은 하루를 보내라고 다정한 할머니의 얼굴을 하고선 내게 인사를 건넨다. 할머니가 오랫동안 고생해서 만들어 논 따뜻한 바람이 나를 향해 불어온다. 오늘도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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