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요유 Jun 19. 2024

들어는 봤나요? 고야라는 과일

아빠의 여자친구

이게 머야?

고야

고야?

응 고야

자두처럼 생겼는데?

고야야 고야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아는데 고야? 토종 자두라고 한다. 한 알 먹어보니 자두 맛인데, 크기는 자두보다 작고 단맛도 자두보다 덜 하지만 야생의 맛이 있다. 우리가 마트에서 사서 먹는 자두는 개량된 종으로 고야보다 훨씬 크고(점점 더 커지고 있고) 고야보다 훠얼씬 달고 점점 더 달아지고 있다.


어디서 났어?

친구가 줬어

어떤 친구?

있어. 친구.


아빠는 친구들의 이름을 분명히 말하는 버릇이 있다. 강병기가 생일이라고 밥을 사줬어, 김행자가 호박을 줬어. 홍성만이 쌀을 주더라고, 이런 식으로. 나는 아빠가 이름을 말해도 그게 누군지 모른다. 이름은 많이 들어 익숙하고, 어렸을 때 뵌 적이 있을 테지만 나는 아빠 친구들에게 관심이 없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인사성이 밝지 않아서 지금도 혹시 길에서 아빠 친구들 마주칠까봐 골목 골목 피해 다닌다.


아빠가 이름을 말하는 것은 엄마때문이다. 엄마도 아빠 친구를 다 알고, 아빠 친구들이 아빠 손에 먹을 걸 쥐어주는 것은 다 아픈 엄마 주라는 것이기 때문에 엄마 들으라고, 혹시 엄마의 기억을 되살리는데 도움이 될까 하여 아빠는 친구들 이름을 크게 말해준다.


그런데 이번엔 그냥 친구라고만 한다. 그렇게 말하는 법이 잘 없기 때문에 어떤 친구인지 다시 물었다. 평소와 다른 나의 질문, 나의 집요함에 아빠가 당황한 눈치다. 이번만큼은 나도 이상한 오기가 생겨서 묻고 또 물었다. 그니까 친구 누군데? 그런데 끝까지 내 눈을 피하고 친구 이름을 말 안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고야를 준 친구가 여자라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이런 쪽의 촉이 꽤 좋은 편이다. 나의 촉은 막연한 감만 가지고 때려잡는 게 아니라 나름의 증거를 기반으로 한다. 고야가 들은 봉지 안에는 잘 익은 황매실과 머위대가 들어있다. 머위대, 삶아서 껍질까지 깐 머위대는 백퍼 여자다. 고야나 매실은 집에서 나무만 있으면 뚝뚝 따서 주면 되지만 머위대는 손이 많이 간다. 이걸 담아서 준다? 이건 여자일 가능성 95%(평소 같았으면 99.9%라고 했을 텐데 집에만 있다 보니 많이 약해졌다), 나머지 5%는 아빠 친구의 부인이 챙겨줬을 가능성인데, 그렇다면 이름을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나저나 누가 줬건, 아빠가 밖에서 여자 친구랑 달달하건 고야랑 매실, 난생처음 먹어보는 과일들인데 정말 맛있다. 우리 가족은 과일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없는 형편에 비해 좋은 과일을 많이 사 먹어서 엥겔지수가 높은 편인데(그만큼 과일 맛이라면 일가견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데), 자신하건대 이거 정말 일급 과일보다 더 맛있다. 고야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맛과 모양을 가졌다. 첫사랑처럼 알콩달콩; 서툴지만 새콤달콤하고, 황매실은 잘 익어가는 황혼의 사랑처럼 깊고 풍부하게 달콤하다. 엄마가 아프지 않았다면, 이렇게 엄마 집에 죽치고 앉아 있지 않았다면 평생 못 먹어봤겠지. 또 새로운 맛의 세계가 열린 기분이다. 이렇게 세상은 넓고 먹어볼 것은 많다. 엄마도 이 세계에 초대해야지. 엄마 입에도 넣어줬다. 입에 들어오자마자 눈이 커지면서 입이 바빠지고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엄마 이거 누가 준 건지 알고 먹는 거야? 이거 아빠 여자친구가 준 거라고!


건수만 잡으면 엄마를 놀리고 싶다. 아니 건수를 만들어서라도 엄마를 놀리고 싶다. 평소 엄마 놀리는 재미로 살았다. 내가 놀리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웃어줬던 엄마인데 지금은 누워서 눈만 꿈뻑꿈뻑하고 말이 없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내가 같은 일로 놀리면 너희 아빤 그런 재주는 없다고 자신했었는데…


엄마, 지금도 그렇게 자신해? 저렇게 순박해 보이는 사람이 사실  바람둥인 거 몰라? 좀 일어나 봐. 지금 이렇게 누워 잠만 자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이전 19화 살 확률 100분의 1이라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