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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 Nov 12. 2024

엄마가 아파서 다행인 이유

엄마가 아프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세계

우리 집은 요즘 김장 얘기가 한창이다. 엄마가 아프지 않았다면 축제와 같았을 이 시간이 엄마가 아무 것도 못 하고 나머지 가족들이 알아서 하려니까 뭔가 어설프고 불안하고 삐그덕거린다.


몇 포기를 해야 할까?


아빠가 배추농사를 지었는데 대략 7~80포기가 된다고 한다. 작년에는 65포기를 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엄마집 두 식구, 우리 집 세 식구, 가까이 사는 친척들, 친구들까지 나눠줄 것까지 포함되어있다.


올해 내가 엄마집에 와서 살림을 해 보니 김장김치를 다 못 먹었다. 중간에 오이김치, 알타리김치, 파김치, 고구마순김치까지 해먹기도 했고, 엄마가 아프다고 여기저기서 가져다주는 겉절이, 고들빼기김치, 물김치를 먹다 보니 김장김치가 남게 된 것이다. 게다가 번외로 만두를 해 먹겠다며 배추 남은 거랑 양념 남은 거랑 대략 버무려 놓은 것도 그대로 남아있다. 김치가 제대로 소진되지 않았고, 엄마가 없으니까 만두용 김치는 손도 못 대고 있다. 이번엔 50 포기만 하자고 했는데 그것도 솔직히 자신이 없어서 자꾸 고민이 된다.


언제 해야 할까?


아빠는 이번주말에 해야 한다고 한다. 순전히 배추의 성장속도에 맞춘 일정이다. 나는 아빠와 달리 남편과 동생이 올 수 있는 일정이 중요하다.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김치도 다 비웠으면 좋겠고, 작년보다 온화한 날씨를 봤을 때 11월 말이나 12월 초에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빠는 배추를 그때까지 두면 너무 커서 안 된다고 한다. 예전에는 우리가 못 오더라도 엄마, 아빠 둘이 했던 일을 이제는 그럴 수가 없어서 일정을 맞추는 것이 어렵다.  


어떻게 절여야 할까?


작년에도 이맘때 김장을 했는데 굉장히 추웠다. 엄마가 뇌출혈 수술하고 퇴원한 지 한 달쯤 지나서 김장을 했다. 그때 엄마는 건강하게 회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수술한 지 얼마 안 돼서 우리 식구는  조금 일찍 내려왔다. 그날밤에 자는데 휘이 휘이, 거친 소리를 내며 창문을 흔드는 굉장한 바람 소리와 함께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깼다. 베란다에나가 보니 엄마가 절인 배추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한밤 중에 뭐 하는 거냐고 소리를 질렀다. 수술한 지 얼마 됐다고 이 추운 날 이 밤중에 이 짓을 하고 있는 거냐고. 엄마를 억지로 끌어들이고 나랑 아빠랑 나가서 배추를 뒤집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배추 절이는 것을 처음 목격했다. 왜 다들 절임배추를 사는 지 이해가 되던 날이다.


이날 밤은 나에게 악몽으로 남아있다. 너무 뒤늦은 후회지만 우리 모두는 무지했고 안이했다. 그날밤 추운 날씨에 찬물에  담아가며 했던 노동이 엄마에게 굉장히 치명적인 충격을   아닐까 생각한다. 아빠에게 말했다. 작년처럼 밤에 일어나서 배추 뒤집는  싫다고, 제발 낮에 절이고 끝나는 일정을 짜달라고. 그런데 문제는 아빠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같다. 그러니 똑부러지게 말을  한다. 그때그때 배추의 상태, 날씨에 따라 절여지는 시간이 달라지기 때문에 해보면서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엄마가  알아서 해왔고 엄마에게 모든 노동과 판단을 맡겼기 때문에 우리 누구도 김장의 과정에 대해서 제대로  모른다. 늘 함께 해왔던 아빠도, 세상 똑똑한 아빠도 엄마 없이는 허당이다. 갑자기 화가 난다. 평생 엄마의 희생으로  먹고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나에게, 아빠에게, 우리 가족 모두에게 화가 난다. 무엇보다 자신을 돌보지 고 오로지 가족 먹일 걱정에 살았던 엄마에게도 화가 난다. 차라리 이런 생각도 해본다. 너무 슬프지만 엄마가 아파서 다행이라고. 엄마가 아파서 혼자 김장을 감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엄마가 아파서 우리 가족 모두가 엄마의 수고와 희생을 조금씩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엄마라는 역할, 엄마라는 무한 노동과 인내와 희생에서 해방되어 다행이라고. 이렇게 우리 가족은 엄마가 아프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세계로 들어와서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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