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보고, 꾸지람 또는 허물, 어느 한 켠의 죄책감
가을이다.
독서의 계절이다.
오랫동안 회사와 육아로 인해 잃어버렸던 나만의 나를 찾기 위해서 어릴 적 좋아했던 책 읽기에 한동안 매진했었을 무렵에는 일 년에 50여 권의 책을 읽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작년에 뜨개에 빠져버린 이후로, 정확하게는 가만히 있을 때 무조건 졸음이 몰려오는 증상을 겪으면서 도저히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침대 옆 책장에는 이미 샀지만 아직 보지 못한 책, 누군가가 선물해 준 책, 갖고 싶어서 샀지만 읽지 않고 있는 책들이 점점 쌓여간다.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읽지 않고 먼지만 쌓여가는 책더미에 죄책감이 들어 책도 사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북은 간간히 사는 이상한 심리 -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럴지도)
책 잡힌다.
주방 옆 하얀 빈 벽에는 독서를 권장하기 위한 독서 트리가 붙어 있다. 읽은 책의 표지를 핸드폰으로 찍어서 작은 포토 프린터로 뽑아 키재기 용으로 나온 기다란 판에 각자의 것을 붙이는 것이다. 트리에 붙는 책이 많아질수록 뿌듯하기도 하고, 다른 가족들은 어떤 책을 읽었는지 볼 수도 있고, 재미있어 보이면 서로 돌려보기도 하는 재미있는 활동이었다. 1년 단위로 정산하고 각자 읽은 올해의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정산을 끝낸 트리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는다. 그리고 동네 맛집으로 기념 점심을 먹으러 간다. 하지만 첫째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해지고, 나 또한 책을 못 읽게 되면서 올해 들어 정말 정체되어 버렸다. 볼 때마다 죄책감이 부스스 일어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괜스레 그런다. 손에 책을 잡아야 하는데 알 수 없는 죄책감만 책 잡힌다. 곤란하기 그지없다. 이 활동도 슬그머니 접어야 할까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나도 초등학생 시절까지는 책을 많이 보다가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거의 보지 않았으니까, 대학 들어가서 방학 때에만 그나마 몇 권씩 봤던 것 같다.)
책이 스스로를 책 잡다니, 좋지 않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책 잡지만 않으면 솔직히 별 문제가 될 것도 없다. 목표를 낮춰 잡으면 되는 것이니까. 아주 얇은 책을 한 달에 한 권씩만 보자라고 생각하면 몰아서 와장창 붙일 수도 있을 듯하다. 꼼수일 수도 있겠지만 한 자도 안 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독서 트리를 각자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족 독서 트리로 한 개만 남겨서 다 함께 채워가도 괜찮을 것이다. 상황은 계속 바뀌어가고, 그에 적응하고 변화해야 하는 것이 인생이지 않겠는가. 물론 모든 아이디어가 현실을 회피하기 위한 핑계라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지만 독서가 힘들고 재미없는 것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할 수 있는 만큼 즐겁게 하는 것. 나의 독서 목표는 그것이다. 억지로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좋지 않다.
그런 이유로 책장에서 한 권을 골라 든다. 얇디얇은 시집이다. 마음에 와닿는 시들은 형광펜으로 표시를 해가면서 하나하나 읽어나간다. 다행히 졸음이 찾아오기 전에 다 봤다. 와! 한 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