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조금 더 멀리 보내는 시간
종이나 원단 위에 색상을 뽑을 때, 검정이나 흰색만큼 다양한 색감을 내는 색상도 드물다.
처음 일본과 일을 시작할 때, 흰색 샘플이 500개 정도 붙어서 책처럼 왔는데, 그때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상식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마 그 샘플 책자를 받지 못했다면, 보지 못했다면 아니 듣지 못했다면 "검정이 다 같은 검정이지 뭐 큰 차이 있어? 빛에 반사되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야!'라고 가볍게 지나쳤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검은색이라고 하면 그냥 어두움 그 자체, 빛이 없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사실 검정은 모든 색깔을 흡수해야 나올 수 있는 색이다. 인공적으로 색을 만들 때에도, 시안(Cyan), 마젠타(Magenta), 노랑(Yellow)을 모두 섞으면 검정(Black)이 된다.
이 검정의 진수를 보여주는 재료를 찾는다면 '숯'의 물성을 꼽을 수 있겠다. 오묘한 질감과 검정이 지닌 농담(짙고 옅음)의 깊이 있는 스펙트럼이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캔버스에 새긴 수백 개의 숯 단면이 각각의 색과 빛을 다채롭게 뿜어내고, 빛에 반사될 때마다 달라지는 그 찬란함이 오히려 묵직하게 다가온다. 일본의 시인 다다토모가 쓴 '하이쿠'(한 줄 시)가 연상되면서.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지금은 불에 타 숯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어린나무의 시기가 있었을 것이고, 여름에는 태양을 가려주고, 겨울이 되었을 때는 내리는 눈이 잠시 쉬어가는 침대가 돼 주기도 했을 것이다. 이제는 숯으로 변해 다시 자연과 함께하는 시기로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더 애틋해지던 때, 이배 선생님의 작품을 만나면서 안도감을 느꼈고,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집에서 함께 하고 있다. 생성과 소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근원적인 힘이 생긴다고나 할까..
어떤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감상은 다 다를 테지만, 작업을 할 당시 작가 자신이 선택한 도구를 대하는 태도와 그 과정을 상상하면서, 각자의 삶에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는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의미 있는 시간이다.
우리가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옷을 통해서 취향을 드러내듯, 일상에서 우리의 메시지를 수용할 수 있는 매개체는 많이 존재한다.
음악가는 음악으로, 화가는 작품으로, 도예가는 도기로..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침묵도 중요하고, 그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비우는 것도 중요하다.
침묵은 언어와 일정한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들이 적정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반갑게 해후했을 때 감동이 피어오른다고 믿는다. 여백이 있는 작품엔 빛이 채워지고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통해 그 여백들이 시시각각 말을 건넨다.
무엇으로 우리를 설명할 것인가.
자신을 설명하는 힘은 무엇일까.
우리 존재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순간 타인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내 존재의 이유를 타인에게서 찾을 필요는 없으니까.
삶의 루틴 속에서 몸에 기억된 것들과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으로 굳어진 자신을 열고, 감싸고 있던 껍질을 벗고, 또 벗어가면서 보내는 충실의 시간을 보낸다.
신시아 오셀리의 말처럼 “씨앗이 최고의 표현을 나타내려면, 반드시 최초의 상태로 시작해야 한다. 껍질이 부서지고, 내부가 드러나며 모든 것이 달라진다. 성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이는 완전한 파괴로 보인다.”
자신에게 솔직해진다는 것은 소중한 훈련이고, 막연히 생각했던 미학이 우리의 삶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순간이다. 반복을 통해 논리와 개념을 구축하고, 그 모든 것이 쌓여 우리만의 고유한 메시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리라.
이런 과정을 통해 한 단계 깊어지고, 그 깊어진 생각을 조금 더 멀리 보내는 것이다. 더 멀리..
책과 함께, 작품과 함께 음악을 들으며 명상하며 생각을 비우고, 내면의 자신을 다시 보고, 참된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
삶 가운데서, 일상 속에서, 우리의 호흡 속에서 스스로를 알아차리며 그렇게 명상하는 하루를 보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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