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차 맞벌이, 20년 차 워킹맘
저는 사실하고 싶은 일이 없었습니다. 부모님, 특히 엄마의 권유로 교사 준비를 했고, 2급 정교사 자격증까지는 땄지만 1급 시험에는 떨어졌습니다. 시험에 떨어지고 다시 시도해 볼까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사기업에 취업했고, 첫 직장도 제가 원해서 선택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제 앞에 놓인 기회를 잡았을 뿐이었어요.
특허번역회사에 취직했고 번역일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년 여가 흐른 뒤에는 컴퓨터 앞에서 혼자 일하며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북적이는 사무실에서 근무할 수 있는 지금의 회사로 옮기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마찬가지였어요. 특별히 원했던 직무가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23년이 흘렀습니다.
한 회사 안에서 여러 업무를 맡으며 살아왔지만, 여전히 저는 제 자신을 소개할 때 머뭇거리게 됩니다. 내가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잘해온 이 일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겠죠.
그렇기 때문에 한때는 ‘꿈의 직업’을 찾아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오랫동안 고민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고민했지만 결국 저는 지금까지도 “내가 하고 싶은 건 뭘까?”라는 질문을 선뜻 답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The Good Enough Job』이라는 책을 만났습니다. 완벽한 직업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괜찮다고, 오히려 내 삶에 균형과 안정감을 주는 ‘충분히 괜찮은 직업’을 선택해도 좋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놓였습니다. 꼭 모든 꿈을 한 번에 이뤄야만 행복한 건 아니라는 걸, 꿈이 없어도 괜찮다는 걸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나도 모르게 ‘포트폴리오 커리어’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23년을 한 회사에 몸담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참 다양한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번역일을 하다가 영업지원 업무로 입사, 부서가 사라지고 관리부로 전보, 그 안에서 구매, 인사, 회계까지... 그때마다 “내가 이걸 잘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어쩌면 이것이 제 방식의 포트폴리오 커리어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회사라는 울타리 밖에서도, 언제까지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서 일할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으로 시작한 커리어 코칭. 특별히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인사 업무를 맡아본 경험 하나만으로 회사 밖에서 커리어 코치로서의 정체성을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제 직함이 제 정체성을 모두 설명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 친구와의 대화, 나만의 작은 취미들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곤 합니다. 이게 바로 『The Good Enough Job』에서 말한 정체성 다변화의 한 모습 아닐까요. 직장에서의 직함만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나의 모습들. 그게 제겐 꼭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뭘까?’라는 질문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제가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걸 명확히 몰라도, 그때그때 주어진 기회를 잡으며 지금까지 걸어온 길. 그 길 위에서 저는 저 나름대로 균형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는 완벽한 직업을 찾지 못했기에 대신 삶의 여러 부분에서 저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The Good Enough Job』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삶의 균형과 의미를 주는 ‘충분히 괜찮은 직업’을 선택해도 충분히 괜찮은 게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