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숲 이야기 / 에세이
폭염과 폭우 그리고 연이어 올라온 폭풍으로 올여름은 다사다난(多事多難)했다. 연말에 주로 쓰는 이 고사성어가 유독 이 여름에 쓰이는 것은 폭염과 폭우 앞에 극한(極限)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처음 들어봤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도 전기 아낀다고 에어컨 없는 여름을 보냈다는 것이 인간의 극한 도전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한숲 주위의 산들이 더위를 막아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9월로 들어서면서 아침, 저녁으로 서늘해지며, 가을이 슬금슬금 들어오고 있다.
해외 근무를 극 더위(+60)와 극 추위(-40)가 있는 나라에서 했다. 처음에는 견디지 못할 것 같은 기후가 적응되면서 그곳에서 즐겁게 살았다. 그곳은 대신 봄과 가을이 없거나 짧아서 한국의 사계절을 만끽할 수 없었다. 사계절에 익숙한 체질은 그곳의 음식과 문화에 동화되면서 견딜 수는 있어도, 봄, 가을의 정취를 오랫동안 느낄 수 없는 부족함은 채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을이 오면 더욱 설렘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한숲으로 이사 온 지도 벌써 6년이 지나가고 있다. 해외 근무하는 동안 잃어버렸던 가을을 이곳에서 만끽하고 있다. 며칠 동안 가을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면서 가을로 접어 들어가고 있다. 가을 단장을 하는 한숲은 그동안 나무들도 많이 자라서 큰 잎사귀가 물들어가면 형형색색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 줄 것이다. 아파트 단지 앞에 우뚝 서 있는 큰 나무는 수령을 자랑이라도 하듯 많은 잎사귀를 품고 있어, 이번 가을은 더욱 풍성해질 것 같다.
도시에 살면 경로당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잘 되어 있지 않다. 어르신들이 모여서 시간을 보내는 곳 정도로 알고 있었고, 주로 농촌 농한기에 많이 이용하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한숲으로 이사 오면서 경로당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농촌 지역의 아파트 단지라 그런지 주변의 경로당과 시설만 조금 차이가 날 뿐, 어르신들의 활발하게 활동하는 소통의 공간이었다.
단지별로 경로당이 다 있지만, 이곳에는 지하에 경로당이 있다. 점잖은 회장님은 까다로운 노인들의 비위를 맞춰가면서 화합에 신경을 쓴다. 읍사무소에서 지원하는 물자나 지원금을 회원들과 상의해서 묵묵히 총무 일도 겸하고 있다. 가끔 사비를 털어서 소주 한 잔을 곁들이며,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하면서 정겨운 시간을 갖기도 한다. 이사를 가는 회원들에게는 조그마한 선물을 준비해서 회원들과 이별의 정을 나누기도 한다.
경로당은 살아온 삶이 다른 만큼 할 이야기도 많지만, 이제는 동네 친구처럼 즐겁게 지내는 인정이 넘치는 곳이다. 가끔 회장께서 노인회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지만, 아직 어르신들과 함께 하기에는 쑥스럽고 어려운 곳이라 가입을 미루고 있다. 정부의 복지 사업이 점점 좋아지고, 노인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사회복지국가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건강하게 100세 시대를 살 수 있는 지금, 경로당은 또 다른 마음의 고향이 될 것 같다.
이번 추석은 가장 긴 연휴로 많은 사람이 이미 해외여행을 떠났거나, 준비하면서 들떠 있을 것 같다. 직장 생활하는 조카들은 한국에서 가장 먼 곳으로 추석 연휴 덕분에 2주간 해외여행을 떠났다. 전국 유명 명소도 예약이 끝났는지 오래전이다. 가족이 오순도순 집에서 지내던 추석은 이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고생했던 국민의 가장 풍성하고, 즐거운 명절인 추석이 되었다.
아버지는 평생 제사를 지내기 위해 추석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집을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추석 당일 아침에 제사 준비를 하다가 쓰러져서 몇 개월 후에 돌아가셨다, 그 이후 제사를 물려받아서 해외 근무에서도 제사를 지냈고, 멀리 해외여행을 가서도 제사를 지냈다. 다행히 그곳이 부모님이 다녀간 곳이라 어렵지 않게 찾아오실 것 같아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추석을 제사와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은 이제 구시대로 막을 내릴 것 같다.
한숲의 추석은 대단지 아파트라 많은 차량이 움직인다. 오고 가는 차 속의 풍경은 추석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이들의 옷과 밝은 모습, 선물 꾸러미들을 가득 채운 트렁크에서 추석이 흘러나온다. 예쁜 옷을 입고 놀이터에 와서 세상의 모든 행복을 가진 모습으로 뛰어노는 아이들, 가족들과 산책하면서 즐거운 표정 속에서 한가위의 대보름의 달이 떠 있는 것 같다. 올 추석에는 처인성에 올라가 보름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