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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폭풍 속으로 들어가다

by 윤 슬

1994년 11월 13일

30년이 지났는데 잊히지 않는 날짜다.

뱃속의 아이가 딱 5개월 들어설 때였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사투리로 집안은 시끌벅적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큰 싸움이 난 줄 알 것이다.

그 시절엔 결혼식 전날쯤 먼 지역사시는 일가친척들이 집으로 미리 와서 하룻밤을 같이 자고 새벽부터 우르르 동네미용실에서 드라이를 하고 식장으로 모였다.


나의 결혼식은 일방적으로 우리 쪽 친척과 지인들이 많았다.

아빠의 사업이 잘되고 있을 때였고 자식을 처음으로 결혼시키는 거였고, 친구 중에 내가 두 번째로 하는 결혼이었다.

그다지 친하지 않은 친구들도 누구누구의 소식을 듣고 궁금했는지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참석해 주었다.


결혼식 준비를 하는 내내 나는 행복함 보다는 불안감과 미안함 죄책감 같은 감정들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미칠 것 같은 입덧이 몸을 괴롭혔다.


혼수준비 하는 내내 엄마에게 끌려다니며

뭐 이리 해가야 하는 게 많은 건지, 안 할래, 괜찮아하면 엄마는" 네가 몰라 그래 살림장만이 쉬운 줄 알아! 다 필요한 거니 얼른 고르기나 해 "

뭐가 필요 한지도 몰랐지만 생각보다 비싼 물건값들에 죄스러워 그저 엄마가 이건 어때 이건 어때 물으면 응 괜찮은 거 같아 괜찮아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시큰둥한 날 보며 엄마가 그랬다.

"무조건 좋은 거로 골라! 아빠 돈 빼먹어야지,

딴년한테 다 퍼주는데 "

결혼하는 자식한테 좋은 걸 해주고 싶은 맘, 뒤편으로 상간녀에게 돈을 퍼주고 있단 생각에 뱉은 가시 돋친 한마디였을 거다.

아빠가 바람을 피우며 써댄 돈이 얼마 인지는 어디까지 무엇을 해줬는지는 모른다.

엄마의 상상인 건지 상간녀가 한다는 커피숍과 빌라를 아빠가 해줬을 거라고 씩씩거리며 엄마 친구와 통화하는 소릴 들은 적이 있다.

어느 곳에서 커피숍을 하는지 알아낸 엄마가 적어둔 전화번호를 보게 된 나는 상간녀에게 전화를 한번 했었다. 자식이 넷이나 있고 엄마가 너무 힘들어하니 아빠와 헤어지라고... 말하니,

아빠를 사랑한다고 헤어질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하더라. 나는 분노가 끓어올라 "미친년아 그렇게 살면 당신 업보 당신 딸한테 다 갈 거야"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결혼식 당일 아침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억지로 헤어 메이크업을 받고 11월 추위에 얇은 드레스만 입고 허둥지둥 야외촬영 이란걸하고 식장에 와서 정신없이 식을 올리고 어색한 미소로 스냅사진들을 찍고

진이 빠져 버렸다. 웃음이 나오지도 않고 미소 짓는 건 어색하고 입꼬리에 경련이 올지경이었다.


빼박이다. 난 이제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와버린 내 인생을 받아들여야 했다.


곤궁한 생활에 위축되었고 근처에 살고 있는 시댁식구들은 불편하고 무서웠다.

어른들이 결혼을 하려면 상대 집안을 본다는 걸 , 집에 재력이나 가문 학벌을 따지는걸, "사랑하면 그만이지" 계산적이다라고 생각했었는대 그게 아니었다.

어떤 부모밑에서 무얼 보고 배우고 자랐는지 어떤 성향으로 컸는지 그 환경을 봐야 된다는 걸... 아무것도 모르고 염두에 두지 않았고 결혼한 후 알게 된 것이다.

시어머니의 큰 목소리와 욕을 들을 때면 소스라치게 놀랐다. 전화벨만 울려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임부복 한벌 사 입어보지 않았고 박스티에 멜빵청바지로 만삭 때까지 버텼으며, 겨울에 그리 먹고 싶던 딸기는 바라보기만 하다, 딸기우유를 집었다.

반찬은 주로 두부, 콩나물, 어묵이었고 친정에 가서 먹고 싶은걸 실컷 먹고 반찬을 싸왔다.

다니던 산부인과도 비싸다 생각해서 거의 막달에 인구복지협회라고 좀 저렴히 출산을 해주는 지금은 가족복지의원으로 바뀐 곳에서 출산을 했다.

이제야 생각하지만 철부지 딸처럼 엄마나 아빠께 사는 게 빈곤하고 힘들다고, 투정도 부리고 경제적으로 지원도 해달라고 왜 한 번도 얘기 못하고 혼자 끙끙거리며 살았는지 모르겠다.


결혼생활을 하면서 행복하다 생각한 적은 거의 없는 거 같다.

빨간펜으로 죽고 싶다고 일기장에 적기 시작했다."죽고 싶어, 죽고 싶다"


많은 행복을 바란 적도 없었다.

집에서 혼자 독박육아를 했었고, 남편과의 어떤 좋은 기억은 하나도 없다.

폭력에 대한 기억이 너무 커서일까...

남편이 미워서 아이도 미울 때가 있었다.


4년 반의 시간 동안 아이를 친정이나 시댁에 돌봐달라 한적은 10번도 안되는 거 같다.

특히나 시댁엔 웬만해서 돌봐달라 하지 않았다.

불결한 환경, 태어나 그렇게나 많은 바퀴벌레는 처음 봤으니 말이다.

어두운 밤 집안을 염탐하며 집안곳곳을 휘져으며 다니던 바퀴벌레들은 전등이 켜지면 순식간에 후다닥 사라지는 모습을 보곤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머리털이 삐죽섯었다.

폭력을 피해 친정으로 몇 번 도망갔던 이후 시어머니는 "어디서 남자랑 쳐 자빠져 자고 들어 왔냐" 며 애 아빠한테 "제 처녀 맞았어?" 묻자 남편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제 처녀 맞아 그건 내가 알아 처녀막 흔적 이불에 묻었거든"

이십 대 중반이었던 나는 자존감이 모두 짓밟혔었다.


결혼생활은 아이 때문에 버텨냈었고 아이를 위한답시고 이혼을 결정했다.

아니 아이를 원망하며 살기보다 아이의 원망을 듣고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한 나의 이기심이었을지 모른다.

4년 반의 결혼 생활은 상처로 마음에 깊은 흉터를 남기고 끝냈으며. 아들에게도 엄마 없이 자라는 상처를 주고 말았다.


폭력가정에서 견디며 아들을 지키며 살아내는 것이 옳았던 건지 내 삶을 찾아 이혼한 게 옳은 것인지는 주위사람들이 이혼하길 백번 잘했다는 말로 위안을 삼으며 살았다.


불행한 가정에서 오롯이 견디며 상처받고 사는 아이보다는 문제 있는 부모에게서 분리되어 사는 게 아이한테 더 좋다고 한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재판을 해서라도 양육권을 받아 왔으리라.


미성숙했던 정신의 아이도 어른도 아니었던 나의 불찰로 시작된 결혼 그리고 결혼생활은 이혼이란 상처로 아이와 나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끝났다.


인생의 기로에서 망설여지거나 앞날이 자신 없을 때는 그 길에 발을 딛지 않는 것이 좋을 때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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