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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학원

다른 길 은 열린다

by 윤 슬 Feb 27. 2025

띠띠띠띠 전화를 누른다. 두근두근 터질 거 같은 심장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소리, 91년도 ○○대학 전형결과를 알려드립니다. 수험번호를 눌러주세요

○○○○번은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대학에 낙방했다.

난 학력고사 세대이다. 340점 만점에 체력장 20점에 320점 시험점수로 전기대, 후기대, 전문대 접수를 할 수 있었다.

1991년도 학력고사 응시생은 1993년 폐지될 때까지  최고의 응시생이 몰렸던 해 이기도 하다.


전기대낙방 후  아빠의 배침몰 사고로 독서실에서 지내고 있던 나는 후기대는  접수할 생각도 않았고 2년제 전문대에나 들어가겠노라 생각했다. 학력고사 점수는 기억나지 않지만,  담임선생님께서  전문대는 충분히 가고도 남을 성적이라 하셨었다.

부천전문대에 산업디자인과가 있는대, 올해부터  실기전형 없이 원서 접수를 받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 쾌재를 불었다.

학교에 직접 방문해 설명회를 들었고 설명해 주는 학생들이 내 선배가 된냥 친근함을 느꼈었다.

난 이미  그 학교 학생이 된듯했다.

하나 이게 웬일  난 전문대마저 낙방했다.

실기전형이 없어졌단 소식은 내 귀에만 들렸을 리 없고 경쟁률이 십대 일에 육박했었단다.

재수를 하라던 아빠의 말을 거역했다.

딱히 뭘 해야 할지도 모르는 막막함에  패닉상태가 되어갈 때  낙방한 같은 반 친구가 직업전문학교란 곳에 입학한다고  거기 디자인과가 있다고 자긴 거길 간다고 귀띔해 줬다.

오호라  내가 갈 곳은 저곳이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나도 아빠를 설득해서

입학을 허가받았다.

직업전문학교는 전문대라도 되는냥, 2년제 과정에 수료를 하면 전문학사를 인정해 준다는 입에 발린 소리로 학생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

1학기 2학기  여름. 겨울방학이 있었고 시험도 보고 과제제출, 성적표도 있었으니...

연령도 다양했으며 남학생들도 꽤나 있었다.

배우고 싶었던 그림의 기초들을 배웠고 새로운 세계가 열린 듯하였다.

주로 동갑내기 여자친구들과 어울렸으며, 전남편을 소개받게 해 준 친구도 이때 친구가 되어 현재까지 친구로 잘 지내고 있다.


내가 원해서 해보게 되는 배움이나 일들을 열심히 하는 나의 성격대로 결석 없이 열심히 하며  '취업'으로 목표를 전환했다.

방학이면  용돈 벌이라도 해볼 요량으로  공장알바도 했다. 커피숍이나 호프집 같은 곳 알바를 해보고 싶었지만 집에서 못하게 했어서 공장 알바를 하게 되었다.

아빤 내가 힘들어서  포기할 거란 생각에  공장알바는 허락했다고 했었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재미도 있었고, 하루종일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과 공장의 하루, 일하고 먹는 밥의 참맛, 돈 버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조금은 깨닫게 되었다.


2년의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가고 있었고,

취업을 준비하며 포트폴리오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학벌의 필요성을 느끼며  상처를  받아봤다.

그즈음 재수를 하던 친구들의 대학 합격소식을 들으면 입으론 축하를 말해주면서도 맘한구석에선  나만 뒤처지나 싶은 가식의 맘도 올라오곤 했다.


혈연, 지연, 학연 세상의 모든 연이 필요하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같은 반에 고등학교 때 동창이 있었는데 수업도 많이 빠지고 과제도 성실히 제출하지 않았던 아이 가 충무로 이름 있는 기획디자인회사에 떡하니 들어간 것이다.

난 고작해야 충무로 인쇄골목 작디작은, 전단지나 명함을 만드는 사무실, 경리와 잡일까지 다해내는 월급 40만 원 주는 회사 같지도 않은 곳에 취업을 했다.

어쩌겠냐 싶으면서도  그 아이가 부러우면서 밉기까지 했었다.

그래 이렇게라도 일하다 보면 거래처 사람들도 알게 되고 인맥이 생기면 더 좋은 회사에 갈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도시락을 싸들고 한 시간 반거리의 충무로로 지옥철을 견디며  출근하였다.


충무로 대한극장 근처는 영화판과 인쇄판이 공존하였었고 인쇄골목은 그때 내 눈에는 지저분한 골목으로 보였었다.

온갖 일을 부려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던 사장은 남자 영업사원과 경리 겸 디자이이너 겸 가끔은 배달 심부름까지 해내는 나, 꼴랑 두 명이었던 직원 중 나를 들들 볶아댔다.


9개월 차쯤 되었을까, 너무 많은 일을 시키는 게 부당하다고 사장한테 대들었다.

사장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이쪽은 다 그래하라면 하는 거야  하기 싫으면 관두면 돼"  시키는 일은 완벽하게 해낸다고 생각했고, 나는 꼭 필요한 사람 일거라 생각한 건 나의 오산이었다.

'그만두겠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일이 아니에요  하고 다음날부터 출근을 하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내가 사회생활을 알면 얼마나 알았겠나ᆢ

그당시 레터링펜으로 했던 전단작업 식자를 잘라 오려붙여 만들면 필름작업을 하고 소부 라고 인쇄판을 만들어 인쇄를 했던 기억이 난다.


또다시 구직을 했고 여기저기 몇 개월 근무한  이력을 적어 이력서를 냈었고 연락온곳은  한껏 꾸미고 가보면 작은 사무실에  전에 다니던 곳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 군대 정도를 잠깐씩 다니다가 그만두고

맘에 드는 곳에 취업을 했다.

여직원도 세명이나 있었고 분야별로 남자 직원도 있었다.

사장님께서도  다른 곳과 다르게 내가 하는 일을 지지해 줬다.

그 당시 애플의 맥킨토시 편집 프로가 들어와 사장님께서 지원을 50% 해준다고 배우라고도 하셨었다.

하지만 배울 기회도 직장에서 커나가는 나의 모습은 더 이상은 없었다.


뜻하지 않은 임신

생리를 하지 않아서  점심시간에 덜덜 떨며 충무로 근처의 어느 허름한 산부인과의 노의사 분께 "임신입니다 " 소리를 듣고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통통했던  나는 입덧에 먹을 수도 없었고 세상 모든 냄새에 구역감을 느껴 한 달 사이에

5킬로 넘게 빠지고 일상생활도 힘들었었다.


짧았던 나의 회사생활은

1년 반 만에  끝났고

충무로 인쇄골목에서 당당한 편집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은

내려놓게 되었다.


그때 임신을 안 했다면

아이를 지웠다면 결혼을 안 했다면, 이런 생각들도 많이 했었지만,

지금은 아들을 출산 한걸 세상에 태어나 제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혼 후 나는  다른 디자이너가 됐다.

헤어디자이너,

지금 이 길이 아니더라도

또 다른 길이 반드시 열린다는 걸

지금은 알고 있다.

당장의 꿈이 좌절 됐다고 길이 막혀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장막에 가려져  희망이 없다고 생각 들어도

꾸준히  길을 걸어가길 바란다.

안개가 걷히고 햇살 가득 파란 하늘이 펼쳐지는 날이 올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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