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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TS Apr 07. 2024

아브람(아브라함)에 대해서 읽고 있습니다.

그는 약점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이었지만, 지금은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신앙인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회색인인 거 같습니다. 떠돌이, 탕자, 잃어버린 영혼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교회에서 함께 중고등부 시절을 보냈으며, 가장 소중한 친구의 형님께서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 고통 속에서도 제게 편지를 남겼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자.' 이 편지를 몇년간 외면해왔지만, 이제는 이 편지에 가타부타 제대로 답을 해야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은 성경을 읽으며, 생긴 온갖 종류의 생각들입니다. 글을 쓰는 목적은 잘 모르겠습니다. 내 생각을 정리하며, 형님의 요청에 정직하게 답을 하기 위해서라고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다섯. 창세기 12장 10절~2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한 아브람은 자신의 아내의 미모 때문에 남편이 자신이 죽을 것을 걱정하고, 자신의 아내를 여동생이라하여 생명을 보존하려고 한다. 그 결과 이집트왕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후처로 들이게 되는데, 이로 인해 여호와는 이집트에 벌을 내린다.이에 이집트왕은 사래를 돌려주며, 용서를 빈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어서 새로울 것은 없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읽으며, 아브람의 비겁함에 짜증이 밀려왔다. 어찌 이정도 수준밖에 안되는 인물을 신앙의 선배라고 할 수 있을까. 남편 아브람의 비겁함으로 인해, 아내 사래는 이집트왕의 후처로 들어가게 된다. 자신의 아내가 권력자의 아내가 되어버리는 상황. 우리 시가에도 이러한 상황이 나온다. 해가의 배경설화에 따르면, 수로부인이 해안가에 놀라갔다가 권력자(바다용왕, 귀신)에게 납치되는 일이 나타난다. 예로부터 권력자들이 약자의 소유를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은 분명하다.


강자로부터 약자의 모든 것들이 유린될 수 있는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구조)에서 모든 것을 개인탓으로 치부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 분명하다. 그래도 신앙의 선배라고 불리는 아브람이었기에, 그가 보였던 행동이 실망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거대한 구조적 부조리 가운데 아브람에게 그것을 거부할 능력은 없었다. 그래도 자신의 아내가 빼앗겼는데, 이 상황에서 아브람은 아무것도하지 않는다. 문제 해결을 할 생각도, 능력도 그에게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해결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로 인하여 그 구조의 정점인 이집트왕에게  벌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약한자다. 그러나 그러한 약함이 그로 신앙의 선배가 되는데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개입할 여지가 많았던 것처럼도 보인다. 나는 약한자다. 강함에 대한, 멋짐에 대한, 저항하는 삶에 대한 동경이 있다. 그런데 약한자여! 그대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거 같다. 세상에는 그대가 처리하지 못할 일들이 많다. 그 거대한 구조 앞에서, 일개 개인이 그대는 약하기 그지 없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대의 방향이 그분을 온전히 향하고 있다면, 그대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분이 개입하실 여지가 생길 것이다.


그래서 저는 당신의 도움을 간절히 구합니다.



여섯. 창세기 18장 3절~5절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아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위의 대화에서 아브라함이 이야기하고 있는 대상은 어떠한 권력자가 아니라, 3명의 나그네 무리이다. 떠돌이 나그네가 지나가고 있다. 언제나 여행객은 상대적 약자일 수 밖에 없다. 나는 세계를 떠돌아 다닐 때, 그러한 약자의 삶을 경험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과거에는 이러한 나그네들에 대한 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안 좋았을 가능성이 높다. 머물러 있는 자에게 나그네는 반가운 존재일 수 없다. 나그네들은 우리의 소유를 몰래 엿보러온 염탐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나그네를 대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을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을 이렇게 대접했던 이유가 그들이 신의 사자인지를 알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징조를 발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그네를 대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내게 있어서 사뭇 감동적이다.


여기서 나의 생각은 도약한다. 그는 어떠한 생각으로 나그네들을 대접했던 것일까.  혹시 나그네를 대하는 아브라함의 태도는 일회적 행위가 아니라, 그의 일상적 행동 특성이 아니었을까. 자신 곁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약자들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늘 무관심하지 않았고 , 그들을 보살폈던 것이 아닐까. 아브라함은 평상시처럼 사람들을 보살폈을 뿐이지만, 그 결과 신의 사자를 만나 신의 계획을 알고, 신과 변론하는 위치에까지 초청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내 주위의 신의 사자를 제대로 섬기며 보살피고 있는 것일까. 내가 지금 신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신의 획을 알지 못하는 것은 신께서 바로 내 주위로 보내셨던 초라한 모습의 '신의 사자'를 보살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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