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신을 잃지 말자.
돌봄 교실 다회차 수업을 끝내고 정리하는데 담당 선생님이 수업 만족도 조사를 돌리신다.
정규수업과 다르게 돌봄 교실 수업은 방과 후 일정이 있는 학생들은 수업을 듣지 않는다.
"자, 그동안 수업했던 느낌 떠올리면서 써주세요~"
그때, 내 수업을 듣지 않았던 한 아이가 안 좋은 일이 있는지 인상을 쓰며,
"저는 아주 만족하지 않음으로 적을 거예요."
그러자 선생님께서,
"너는 이 수업 들어본 적 없었으니까 안 적어도 돼."
그랬더니 당돌하게,
"왜요? 저도 학생인데, 설문조사 할 권리가 있지 않나요?"
하는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수업을 하다 보면, 간혹 그런 아이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내 수업을 듣지도 않았던 터.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표현을 할 수도 없었다.
선생님께서 조용히 내 손을 잡아주셨다.
그렇다. 나는 학교에서는 갑과 을도 아닌 병에서 정쯤 되는 한낱 강사일 뿐이었다.
돈 받고 하는 일이 다 그렇다지만, 그날따라 적자인 강의료에 괜시리 마음이 더 시렸다.
초3에게 그런 말을 듣고도, 뼈 없이 한 말이라고 그냥 넘겨야 하나.
아님 한 없이 자존감이 무너져야 하는 건가.
그러면서 난 오늘도 장기 강의계획안을 쓰고 있다.
눈을 감고 다시 기억 속 테이프를 돌려보았다.
그 아이는 수많은 학생들 중에 티끌만 한 점일 뿐이었다. 반면, 나만 바라보고 있는 여러 개의 반짝이는 눈빛들이 보였다. 자신의 떠오른 생각을 한 마디만이라도 얼른 전하고 싶어 한번만 시켜 달라 손을 높이 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저 눈빛들.. 처음엔 물어봐도 끝까지 대답을 안 하던 아이였는데, 한 회차 두 회차 지날수록 자기 생각과 느낌을 길게 표현하려는 아이. 관심을 받고 싶어 한 행동이었는데, 모두가 불편해한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 깨닫고는 그 뒤로 바른말만 하는 아이. 본인도 처음엔 그랬는데, 이제는 떠들거나 집중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하지 말라며 정돈시켜 주는 아이. 내 신발을 숨겨놓고 아무렇지 않은 척 시크하게 굴다가, 지금은 갈 때마다 나에게 안기는 아이..
그 반짝이는 눈빛들이 모여 내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 작은 빛들이 모여, 내 손을 다시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나는 한낱 잠시 스쳐가는 어른일 뿐이지만, 단 한 아이한테 만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그냥 직시하지 않겠다. 그저 꿋꿋이 나의 길을 가야 한다.
만약에 아이들이 100% 중에 20%만 가져간다 할지라도, 20%를 얻은 거지 80%를 잃었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 20%가 5번만 하면, 100%를 만들어 준다.
그런 사명과 책임감이 또 어떻게든 버티게 하는 힘이 된다.
평가에 휘둘리면, 갑자기 사는 낙이 없어진다.
그러나 여기서 무너지면, 내가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