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치유, 무의식 치유, 내면아이 치유
공감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방법론으로 배우고 머리로 이해하는 과정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경험을 해보는 것입니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줄 힘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자라면서 환경적으로 그 공감의 자리를 경험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공감의 자리는 맞다도 아니고 틀리다도 아닙니다. 옳다도 아니고 그르다도 아닙니다. 더 깊은 정화의 과정으로 가면 긍정도 정화의 대상이 됩니다. 긍정과 부정 두 가지가 다 정화가 되어야지 정말로 각각의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각도로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그럴때의 내 마음 상태도 알고 영향력도 알고 여러가지가 복합적으로 고려된 상태에서는 자신의 선택을 해나갈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항상 바뀔 수도 있고 항상 그렇게 좀더 사고하며 한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길을 계속 찾아갈 수 있습니다.
한가지 상황에서 한가지 해결책, 정답인 가장 좋은 한가지 방법, 가장 옳은 한가지 길이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옳고 맞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다를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혹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자신이 되어가고 싶은가 자체를 찾아가는 과정이 삶 자체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한 그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공감의 공간은 고요한 공간입니다. 마음이나 감정이 있을 자리, 발판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러이러해”라는 말을 들었을때 “그렇구나. 너는 이러이러 하구나. 네 마음이 이렇구나.”하는게 그렇게 어렵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데 익숙해져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떤 말을 들으면 내 안의 다른 마음들이 건드려져서 그 마음이 반응을 하기 때문입니다.
"힘들겠네.", "피곤하겠네.", "속상하겠네." 이러한 마음의 위로를 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에게는 "피곤하구나.", "화가 났구나.", "속상하구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올라오는 감정 상태를 있는 그대로 알아주고 들어주는 상태입니다. 이 힘을 가진 것이 마음의 순수한 자리, 중단전입니다.
감정에 좋고 나쁨의 딱지를 붙이게 되면 그 감정 자체가 있을 자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즐거움은 좋은 감정이고 슬픔이나 화는 나쁜 감정이라고 하면 "화가 났구나."가 아니라 거기 덧붙여 "화가 나면 안돼. 그건 나쁜거야."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화도 화 자체로 들어줄 수 있는 공간이 생길 때 화 뒤에 있는 다른 감정과 마음들을 비로소 더 만나갈 수 있습니다.
화, 미움 등은 어떤 의미에서는 겉감정이고 그 안에는 계속 다른 속마음과 다른 감정들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감정의 층위를 따라서 감정과 그에 따른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가다 보면 점점더 깊은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깊은 부분들과 더 닿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 만나가는 과정이 첫번째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그렇게 들을 수 있는 공간도 조금씩 생길 수 있습니다.
마음에 힘이 생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