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곡*
연희 시점) 너를 만나던 순간 - 남혜승, 박상희
원우 시점) 다시 볼 수 있다면 - 남혜승, 김수현
*소설 속 모티브와 콘셉트 외의 인물, 단체, 장소, 사건 등은 모두 실제와 관계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나 기자, 오늘 인터뷰는 정말 중요한 자리야. 준비됐지?”
아침 일찍 사무실에 도착해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뽑으려던 찰나, 편집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준비 다 됐습니다.”
그녀는 항상 차분하게 일을 처리했다. 어떤 순간에도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오늘 인터뷰는 다르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유원우 때문이었다. 노트북 화면 속에 펼쳐진 그의 사진과 준비한 질문지를 훑어보며 그녀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유명 밴드 ‘스윗드림’의 보컬이자 키보디스트인 그가 인터뷰를 요청해 왔다. 기자로서 그녀는 흔쾌히 응할 수 있었지만, 그가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킬지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그녀는 도착한 카페에서 유원우를 마주했다. 처음 보는 얼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처음 보는 그가 아닌 오래된 기억 속의 그였다. 그가 지금은 이렇게 멋진 남자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다. 무표정일 땐 한없이 차가운 외모, 어쩐지 익숙하다. 카메라 앞에서 항상 웃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다소 피곤하고 무겁게 보였다. 나연희는 그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침묵 속에 그를 바라보았다.
유원우는 앉기 전 나연희를 향해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 기자님, 정식으로 인사 나누는 건 처음이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그때와 다를 바 없이 부드러웠다. 하지만 눈빛은 달랐다. 그때는 어두운 무대에서 초롱초롱 빛나는 눈이었다면, 지금은 카메라와 팬들의 시선 속에서 한껏 자신감을 내비치는 눈빛이었다. 그런 그가 왜 이렇게 떨고 있을까? 그가 과연 그녀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궁금해졌다.
“저.. 나연희 기자님?”
“아아..! 안녕하세요, 유원우 씨.” 자기도 모르게 잠시 멍 때리던 그녀는 감정을 숨기며, 프로페셔널한 표정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이 마주쳤을 때, 잠시 멈칫했다. 뭐야, 왜 이렇게 잘생겼지?
유원우는 자신도 모르게 나연희 기자를 살짝 바라보았다. 그녀는 겉보기엔 얼음공주처럼 차갑고, 도도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것 같았다. 뭔가 좀 무섭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프로페셔널한 모습 뒤에 숨겨진 깊은 무언가가 있는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긴장될까? 대체 이 기자는 어떤 사람일까?
차가운 그녀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자꾸만 시선을 끌었다. 아이보리색 블라우스에 깔끔하게 다려진 검은 슬랙스, 그리고 같은 색의 재킷을 걸친 모습이 단정하면서도 세련되고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격식을 차린 듯하지만 과하지 않았고, 딱 필요한 만큼만 갖춰 입은 느낌이었다.
잠시 멍 때리던 그녀가 한눈에 봐도 큰 눈을 또렷하게 뜨며 첫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잠시 자리에 앉는 동안, 유원우는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프로페셔널한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묘하게 신경 쓰이는 표정 때문인지.
‘이런 게 커리어우먼의 모습인가.’
그녀가 다리를 꼬고 앉자 흰색 스틸레토 미들힐이 눈에 들어왔다.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신발이었다. 마치 그녀 자체처럼. 단정하고 차분해 보이지만, 속은 단단할 것 같은 사람.
유원우는 무심한 듯 아닌 듯 그녀를 다시 한번 훑어봤다. 흔히 보던 기자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고 서류를 정리하는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이 기자님, 묘하게 분위기가 있네.’
그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생각했다. 이 인터뷰, 예상보다 재밌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럼 인터뷰 진행해도 괜찮을까요?" 나연희가 물었다.
유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그가 미소를 지었지만, 나연희는 그 미소 뒤에 숨겨진 긴장감을 바로 읽을 수 있었다. 마치 그가 그녀에게 첫인상을 좋은 남자로 남기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연희는 그 미소에 조금 더 집중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항상 직업적인 면을 우선시했으니까.
“네 그럼, 질문드리겠습니다.” 나연희는 메모장을 펼치며 여전히 무표정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번 앨범의 콘셉트는 어떻게 되나요?”
유원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이번 앨범은 그동안 제가 겪었던 고통과 성장을 담아냈습니다. 팬들에게 진심을 전하고 싶었어요.”
첫 질문부터 그의 대답은 매우 진지했다. 나연희는 그가 말할 때마다 조금씩 예상하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 그가 단순히 무대에서만 빛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밴드의 인기와 성공 비결은 무엇인가요?” “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신가요?” 그녀는 평소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직업적으로 그의 이미지와 무대 아래에서의 모습에 대해서도 물었다. 유원우의 답변은 생각보다 진지했다. 가수로서의 삶, 팬들과의 관계, 그리고 무대 위에서의 역할과 무대 아래에서의 본모습에 대한 이야기. 유원우는 침착하게 답을 이어갔지만, 그녀는 그의 말속에서 무엇인가를 감지할 수 있었다. 불안함, 외로움, 그리고 진실을 숨기려는 듯한 기운.
유원우는 질문에 답변하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딱딱할 것 같으면서도, 대화를 나누면 또 생각보다 부드럽다. 거리감이 있는 듯하면서도, 왠지 더 알고 싶어진다. 그 순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느끼고는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마치 갑자기 기침이라도 나올 것처럼 목을 한 번 가다듬으며 자연스럽게 넘기려 했다.
나연희가 의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괜찮으세요?”
유원우는 최대한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갑자기 목이 좀 간질거려서요.”
나연희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다시 질문지를 살피느라 금세 시선을 돌렸다.
유원우는 손을 천천히 내리며 생각했다. 흥미롭다. 그리고 어쩌면 이 인터뷰, 예상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을지도 모르겠다고.
인터뷰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나연희가 어떤 질문을 던지든 유원우는 전혀 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답했다. 그는 직업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 미래에 대한 고민까지 털어놓았다. 나연희는 그에게서 완벽한 가수의 모습이 아닌, 인간 유원우로서의 모습을 점차 보게 되었다. 그의 진지한 태도, 진심 어린 대답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래 이거였다. 몇 년 전, 공연장에서 봤던 유원우의 느낌. 그때 그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날, 무대 위에서 노래를 마친 유원우는 관객들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조명이 그를 비추고, 관객들은 숨죽여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마이크를 다시 들고, 낮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음악을 하면서 늘 생각해요. 내 노래가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을까. 내 목소리, 내 가사가, 이 순간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을 수 있을까. 그런 순간이 한 번이라도 온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요.”
나연희는 그때의 그 목소리와 표정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확신에 찬 눈빛, 그리고 그 눈빛에 담긴 진심. 지금 그녀 앞에 앉아 있는 유원우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 깊어지고 단단해진 듯했다.
"유원우 씨는 기자들이 두렵다고 하셨죠?" 나연희가 질문을 던졌다.
유원우는 잠시 멈칫했다. 그의 표정에서 잠시 감정의 변화가 읽혔다. "네, 그렇습니다. 기자들은 제게 언제나 칼날 같은 존재였죠. 누군가는 저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냥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니까요."
나연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기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 두려워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가 느끼는 그 두려움이 단순한 공포가 아닌, 그가 진정으로 어떤 면에서 기자와의 관계를 바꾸고 싶어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도, 기자라는 직업이 무서운 동시에 멋지다고 생각하실 것 같아요." 나연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결국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니까요."
유원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아요. 내가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죠."
나연희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 말을 그대로 느꼈다. 그 눈빛 속에 숨겨진 감정은 단순한 가수의 이미지 그 이상의 무엇이었고, 그 눈빛이 자신에게 전달되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감정은 절대 섞어선 안된다. 이 인터뷰는 그저 하나의 기회이자 업무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오늘 인터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유원우 씨, 감사합니다." 나연희가 노트북을 덮었다.
유원우는 짧게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좋은 기사 부탁드립니다."
잠시 주저하던 그가 이어서 말했다. “나 기자님, 제가 생각보다 많이 긴장했나 봐요. 죄송합니다.”
그 말에 나연희는 잠시 멈칫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
그의 눈빛에서 그녀는 무대 뒤에서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는 다른, 조금 더 소심한 면을 발견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조금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직업적인 거리감 속에서도, 그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연희는 마음속으로 한 가지 결심을 내렸다. 유원우는 기자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더욱 알아가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자칫하면 그와의 관계를 넘어설 것 같았다. 감정을 절대 드러내지 말아야 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며 자리를 떠났다. 최선을 다해 솔직하게 답해준 그에 대한 고마움에 이번 인터뷰가 마지막이 아니길 내심 바랐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빛이 그녀의 마음속에 깊이 박힌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자는 감정을 기사의 문장 뒤에 숨겨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와의 대화는 단순한 인터뷰를 넘어 나연희의 무심한 일상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경계 너머에서 누군가를 바라보는 일, 그리고 그 시선이 다시 자신을 향할 때의 두근거림. 그녀는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결국 깨닫고 말았다.
이미 선을 넘어버렸다는 것을.
그날, 인터뷰 후에도 유원우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단순히 인터뷰를 일의 연장선으로 해치우듯 넘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다해 이야기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시각 유원우 역시 다시 떠올린 그녀의 냉정한 표정 속에서, 무엇인가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