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긍정과 망설임 사이

by 마감했나연

추천 곡) 사랑해줘요 - 마인드유


​*소설 속 모티브와 콘셉트 외의 인물, 단체, 장소, 사건 등은 모두 실제와 관계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새로 방영하는 드라마 제작발표회 현장이 끝난 후, 나연희는 일정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초호화 라인업으로 인해 시청자들의 기대가 큰 드라마의 제작발표회라 유난히 바쁜 하루였고,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익숙한 이름이 떠올랐다. 유원우다. 짧은 메시지가 하나 도착해 있었다.


[바쁘지 않으면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요?]


나연희는 잠시 멈칫했다. 정신없이 바쁘던 투어를 마치고 나서인지 약간의 여유가 느껴졌다. 최근 몇 번의 비공식적인 만남을 이어가고 있던 그였기에, 다시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만남을 요청하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문득 마음 한구석에서 불편함과 함께 호기심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왜 이렇게 갑자기...? 취재 때문인가?’ 순간 고민했다.


휴대폰을 쥔 손이 잠시 떨리며, 나연희는 몇 초간 메시지 창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기자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호기심이 그 고민을 눌러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지금 괜찮을 것 같아요. 다음 일정 때문에 길게는 못 봐요. 어디서 만날까요?]


몇 초 뒤, 유원우의 답장이 도착했다.


[카페에서 간단히 얘기 나누고 싶어요. 기자님 회사 근처로 제가 갈게요. 30분이면 될 것 같아요.]


나연희는 알겠다며, 짧게 답장을 남기고는 사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번 만남은 또 어떤 대화로 이어질지, 알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묘하게 두근거렸다.


-


“여기 앉을까요?”


약속 장소는 회사 근처 인적 드문 한적한 카페였다.
유원우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창가 자리로 향했다.
지난번 투어 후속 인터뷰 현장에서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는 다르게,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었어요."


나연희가 웃으며 자리에 앉자, 유원우는 잠시 말없이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냥… 기자님과 좀 더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나연희는 살짝 놀랐지만, 곧 덤덤하게 물었다.
“보통 연예인들은 기자를 피하지, 먼저 만나자고 하진 않던데요?”


유원우는 피식 웃었다.
"기자가 아니라… 그냥 나연희 씨와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 말에 그녀의 마음이 잠깐 흔들렸다.
취재원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누군가가 자신과 대화를 원한다는 것. 이런 느낌도 오랜만이었다.


“그럼 오늘은 그냥 대화만 할까요? 기록도 없고, 기사도 없고. 저도 아무것도 준비 안 하고 왔어요.“
나연희가 제안하자, 유원우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음악 이야기, 취미 이야기, 데뷔 초의 에피소드까지.
무대 위 유원우는 늘 카리스마 넘치는 아티스트였지만, 무대 밖의 그는 고민이 많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기자님은 왜 연예 기사를 쓰기로 했어요?”


그 질문에 나연희는 잠시 말을 멈췄다.
사실 그녀는 처음부터 연예 기사를 쓰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빠르게 기사화되는 소식과 자극적인 헤드라인 속에서, 기사를 쓰는 본질과 이유는 잊은 채 모든 게 조회수 장사 같이 느껴져 속이 울렁거리는 상황에서 진짜 이야기를 전달하기란 쉽지 않았다.


“처음엔 그냥, 글을 쓰는 일이 좋아서였죠. 그런데 일하다 보니, 화려해 보이는 무대 뒤에도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 뒤부터는 무조건 화제성만 쫓기보단, 그 사람의 진짜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고요.”


유원우는 그녀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기사, 사실 잘 못 본 것 같아요."


나연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기자들도 다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 순간, 그녀는 직감했다.


이 관계가 단순한 취재원과 기자 사이를 넘어설 수도 있다는 걸.


하지만 동시에, 그 선을 넘는 순간 누군가는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걸.


유원우는 기회라도 잡은 듯 나연희에게 더 많은 개인적인 질문을 던졌다. 나연희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어색해 보였지만, 그녀 역시 점차 그에게 마음을 열어가고 있었다.


"나 기자님은 이런 일이 많나요?" 그가 물었다. "연예 기자로서, 가수나 배우와 인터뷰를 하면서 개인적인 감정을 느낄 때가?"


나연희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런 일은 전혀 없어요. 연예인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느껴질 여유도 없고 그런 감정은 가지지 않으려고 하죠. 직업적으로 상대해야 할 사람들일 뿐이니까요.”


유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럼 왜, 나한테는 이렇게 다가오는 걸까요?”


그의 말에 그녀는 순간 당황했다. 유원우의 눈빛은 진지했다. 마치 그녀의 속내를 꿰뚫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연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자로서, 그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제가 그런 느낌을 준다면, 미안해요.” 나연희가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저는 그냥 당신의 음악과 이야기에 흥미를 가졌을 뿐이에요.”


유원우는 그런 나연희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음악이요?” 그의 눈빛에는 약간의 웃음기가 담겨 있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진지한 기색이 엿보였다.


“음악을 사랑하는 원우 씨의 모습이 멋있었거든요.”

나연희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유원우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천천히 나연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음악이 저한테는 항상 가장 중요한 거였어요. 음악을 시작한 이유도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저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고 싶어서였죠. 사람들이 제 음악을 듣고 느끼고, 함께 울고 웃는 걸 보면 그게 저에겐 정말 큰 기쁨이었어요."


유원우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멀리 있는 무언가를 응시하는 듯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음악이 저를 숨기게 되는 수단이 된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에는 소수의 팬들에게 인기 있는 가수였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인기가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제 노래보다 제가 누구와 사귀는지, 어떤 사건을 겪었는지에 더 관심을 가지더라고요. 그래서 점점 더 무대 위에서만 내가 진짜 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나연희는 그가 말하는 동안,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복잡한 감정선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음악이 자신을 숨기는 수단이 되는 것 같다는 말. 지난번에도 지나가듯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 유원우는 음악을 통해 진정성을 찾고자 했지만, 그 진정성이 오히려 그를 가두는 울타리가 되었던 셈이었다.


유원우는 잠시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나연희는 그의 눈에서 공허함을 느꼈다. 유원우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연희는 그의 말을 들으며 음악이 그에게 유일하게 진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말을 아꼈다. 그의 내면의 고통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그에게 무언가 말하는 것조차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왜 지금 나에게 이런 말을..." 나연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원우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자들한테 이야기할 사람은 없어요. 나도, 음악 외에 다른 걸 말할 때는 두려워요. 그런데 기자님은.. 다르잖아요”


그 순간 나연희는 그의 진심을 느꼈다. 그는 나연희가 자신을 기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이해해 주길 원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그에게 이끌리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 감정이 단순히 감정적인 동정이나 관심이 아닌, 진심으로 그의 고통을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원우 씨..“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해해요. 그리고 당신의 고통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의 이야기가 기사로 나가는 걸 원치 않는다면, 제가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기자로서의 역할이니까요. 오늘 나눈 이야기는 인터뷰 명목은 아니었으니 오프 더 레코드로 고이 덮어둘게요.“


유원우는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리고 그것이 더 어렵다는 걸 이해합니다. 그냥... 사람으로서 이렇게 같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나연희는 그 말에 마음이 아릿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직업적인 경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기자로서, 그녀는 유원우의 고백을 마음에 담아두고는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 역시 그에게 점점 더 끌리고 있었다.


“원우 씨의 음악은 마음을 울리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어렵게 들리지도 않는데, 그렇다고 흔한 느낌도 아니에요. 노래를 참 잘 만드는 것 같아요.“ 나연희는 예전부터 하고 싶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직접 만든 음악으로 활동하는 게 쉽지는 않죠.”

유원우가 커피 잔을 가볍게 돌리며 말했다.


“그런데도 이 길을 계속 가고 싶어요. 내 목소리로, 우리 팀의 색깔로 만든 음악을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다는 게… 그게 가장 큰 자부심이에요.”


나연희는 그의 말을 조용히 새겼다. 화려한 무대 위의 모습이 아니라, 이렇게 차분한 태도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말하는 모습. 음악에 대한 진심이 느껴졌다.


“작업할 때 힘든 점은 없어요?”

나연희가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유원우가 미소를 지었다. “없으면 거짓말이죠. 쉽지 않아요. 곡이 잘 안 나올 때도 있고, 만든 걸 다 뒤집어야 할 때도 있고. 그런 날이면 그냥 도망가고 싶어요.”


“정말로 도망간 적 있어요?”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어차피 다시 돌아와야 하니까.”


나연희도 따라 웃었다. 음악이 단순한 일이 아니라, 삶의 일부가 된 사람. 그런 사람이었다.


“멋있어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유원우가 살짝 눈을 크게 뜨며 나연희를 바라봤다.

“뭐가요?”


“음악을 대하는 태도요.” 그녀는 잔잔하게 웃었다.

“원우 씨는 진짜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같아요. 그게 전해져요.”


유원우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색한 듯 웃다가도, 나연희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느끼고는 살짝 시선을 돌렸다.


“생각해 보면, 제가 기자를 하면서 인터뷰했던 아티스트 중에서 이렇게까지 자기 음악에 대한 자부심을 강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흔치 않았어요.” 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런 점이 참… 존경스러워요.”


유원우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기자님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좀 쑥스럽네.”


“왜요, 저는 원래 진심만 말하는 사람이에요.”


그의 눈가에 잔잔한 웃음이 떠올랐다. 나연희도 덩달아 미소 지었다. 서로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그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나연희가 먼저 자리를 정리하자, 유원우는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도… 이런 시간 가질 수 있을까요?”


나연희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긍정인지, 망설임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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