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에게는 비밀은 비밀이 아니게 된다.

by 소정

우리 둘째는 수다쟁이다.

엄마와 있을 때나 아빠랑 있을 때나 언제나 재잘재잘 지저귄다.

"엄마, 있잖아요~ 놀이터에서 남자애가 나무 뒤에 가서 오줌 쌌어요!"

"아빠, 아빠~ 있잖아요~ 오늘 00랑 같이 놀이터에서 놀았는데 걔가 하고 싶은 것만 하자고 해서 그냥 집에 왔어요."

"엄마~ 있잖아요~ 오늘 점심에 탕수육이 나왔는데 조금밖에 안 줘서 속상했어요."

"엄마~ 아빠~ 있잖아요~~"

둘째가 '있잖아요~'라고 운을 땐 순간 '오늘도 어김없이 할 말이 많나 보군. 심호흡 크게 하고 들을 준비를 하자!'며

다짐을 한 뒤 외친다.

"응~ 둘째 딸~ 왜?"


말하기를 좋아하는 둘째이기에 대화를 많이 하다 보면 아내가 몰라야 하는 일들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아빠, 있잖아요~ 비가 와서 친구들이랑 못 놀아요."

"그렇지, 오늘은 집에 있어야겠다."

"아... 심심해. 심심해."

"책 보거나 숙제하면 되지 않을까?"

"아.. 싫어요. 아빠, 유튜브 잠깐 봐도 돼요?"

"그래... 조금 만이야. "

"네~ 엄마한테는 비밀이에요. 알면 혼난단 말이야..."

"걱정하지 마! 아빠는 입이 무거워!"

둘째는 그제야 유튜브로 어린이 채널을 보면서 키득키득 웃는다.

다음 날 아침,

"여보!"

"네?"

"어제 해령이 유튜브 보여 줬다며?

"어? 어떻게 알았지?"

"해령이가 다 말했어. 유튜브 보여주지 마요. 알았지?"

비밀이라며? 나는 둘째를 쳐다봤지만 은근슬쩍 내 눈을 피하고 학교 갈 준비를 한다.


둘째와 같이 제법 먼 거리에 있는 문구점까지 자전거를 타고 간 적이 있었다.

"우와~ 해령아, 우리 정말 멀리 왔다."

"여기까지는 자전거로 처음 와 봤어요. 대단해~"

"그래... 우리 둘째 대단하네."

"근데, 있잖아요~ 목이 말라요."

"그럼 물 마실까?"

"힝..."

둘째는 물이 아니라 음료수를 마시고 싶다는 신호다.

"그럼 편의점 가서 음료수 마실까?"

"네! 좋아요!"

편의점에 들러 나는 콜라를 둘째는 10% 미만의 과즙이 들어간 파인애플 주스를 사 마셨다.

(전에 한 번 언급한 것 같은데, 아내의 주스론에 따르면 100% 과즙이 아닌 건 다 가짜고 설탕물이기에 '가짜 주스'라 마시면 안 된다.)

"우리 콜라, 주스 마신 거 엄마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거 알지?"

"그럼요~"

또 그다음 날,

"여보! 왜 콜라 마시고 해령이는 가짜 주스 사줬어요! 안된다니까!"

"아빠~ 해령이 주스 사줬어요? 나는? 나는요?"

아내와 첫째의 폭풍 잔소리를 들으며 또다시 둘째를 쳐다봤다.

'어~ 왜 갑자기 화장실 가니? 아빠만 놓고!'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둘째가 피아노 학원을 수년간 다니고 있는데 최근 표정이 별로다. 피아노 학원 가기 싫다고 하는 적도 있었다.

"해령아~ 피아노 학원 가기 싫어?"

"네."

"왜? 피아노 학원이 힘들어?"

"피아노 치는 게 너무 어려워졌어요. 그래서 선생님한테 혼나요."

"아... 어려워서 그랬구나. 해령이가 피아노 실력이 점점 늘어서 그만큼 어려운 걸 하는 것 같아. 그럼 피아노 치지 말까?"

"아니에요. 그래도 피아노 계속 치고 싶어요."

어렵다고 힘들다고 피할 줄 알았는데 계속하겠다는 아이가 대견스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아빠, 있잖아요~ 엄마한테는 비밀이에요!"

"응. 아빠가 비밀 꼭 지켜줄게!"

그날 밤, 아내가 둘째를 재우고 심각한 표정으로 거실로 나왔다.

"여보, 해령이가 피아노 치고 싶지 않다네. 못한다고 혼나서 그런가 봐."

어.. 어떻게 알았지? 그래도 모르는 척해야겠지?

"정말? 처음 듣네."

"무슨 처음이야. 당신한테도 말했다던데..."

앗.. 이번에도...


대개 둘째가 비밀이라고 한 것들은 24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밝혀지고 만다.

'둘째가 이렇게 입이 가벼웠나? 너무 가벼워도 문제인데...'

비밀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는데 비밀누설의 이유는 금방 풀렸다.


평소 아내와 둘째는 한 침대에서 같이 잔다.

잠들기 전 둘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 번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해령아 오늘 뭐하고 지냈어?"

"학교 끝나고 00과 ㅁㅁ랑 같이 놀았어요."

"아~ 그랬구나. 그리고?"

"으음... 영어 숙제하고 수학 문제 풀었어요."

"그래? 엄마한테 할 말은 없고?"

"없어요."

"비밀 있는 거 아니야? 얼른 말해봐..."

"... 있잖아요..."


아... 비밀누설의 장소는 침실, 시간은 둘째가 자기 전,

졸리고 노곤한 이때 아내의 유도신문이 해령이를 무장해제시킨 것이다.

비밀누설의 이유를 알았으니,

딸과 나의 비밀이 생겼을 때는 아내와 둘째가 잘 시간에 같이 일찍 자야겠다.

나도 딸과 둘만의 비밀을 만들고 싶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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