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는 돈쓰기입니다.

by 독고다히

오랜만에 대학교 친구 중 한 명을 만나는 날이었다.

(참고로 나는 대학교를 3군데나 다녔고, 그중 첫 번째 대학교 친구이다.)



생사만 주고받은 지 몇 년째, 친구가 먼저 나의 안부를 묻는 연락으로 시작됐다.

"너 잘살고 있는 거 같은데, 우리 언제 한번 봐야지"였고 그 언제는 3년 후 성사되게 되었다.



구체적인 날짜를 잡고 나서 갑자기 설레기 시작했다.

친구를 오랜만에 본다는 설렘 반. 저번 주에 산 블라우스를 개시할 셀렘반.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친구를 기다리며 화장품 쇼핑에 몰두하고 있는 내 등 뒤로

"여전하네?"라며 나를 너무 잘 아는 친구가 도착했다.



술을 좋아하는 친구는 능숙하게 자신의 단골가게로 안내했고, 주문 또한 빠르게 해치워버렸다.

이제 나의 임무는 친구와의 회포를 푸는 순간순간마다 친구의 술잔이 비지 않도록 컨트롤해주면 된다.



과거의 대학시절 동기들 얘기부터 현재의 직장에 대한 불만사항까지 끝도 없이 이야기가 오고 갔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모습은 예전과는 다른 어른의 향기가 느껴졌다.

말투, 표정, 행동에 여유가 흘러넘쳐 보였다.



친구의 놀랄만한 최신 근황이 이어졌다.

"나 남자 친구랑 헤어졌어."

무려 친구는 8년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것이었다. (X는 나와도 같은 과 동기였기에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다.)

나는 친구가 X와 8년을 지금까지 사귀고 있었다는 것에 처음 놀랬고, 8년이나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것에 두 번째로 놀랬다.



"후련해"

친구의 표정은 마치 가려운 곳을 피가 날 때까지 긁어 더 이상 가려움을 느끼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친구의 폭탄발언을 안주삼아 자정까지 음주를 즐겼다.



다음날이었다. 평상시와 같이 점심시간만을 학수고대하며 일을 하고 있는데 내게 문자 한 통이 왔다.

'너 소개팅하지 않을래?' 어제 만났던 친구의 연락이었다.



"잠깐만"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다.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남들은 모르는 남자 울렁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일단 알겠어" 울렁증 있는 거 치고는 내대답은 빨랐다.



몇 분 후 "안녕하세요 소개받고 연락드려요."라는 말과 함께 연락이 시작되었다.

문자상의 상대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유머 코드가 잘 통했다.

그러나 만나보기 전까지는 상대를 단정 지을 수 없기에 빠르게 주말에 바로 만나기로 정했다.



상대방은 술을 좋아하는 듯 장소는 우리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자카야에서 보자고 하였다.

나는 조금은 들뜬 마음을 뽐내듯 이십 분이나 일찍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시간보다 십 분이 훌쩍 지나자 흰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가 한 명 들어왔다,

나 또한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어 흠칫했다,



남자는 나보다 네 살 많았고, 이야기의 주제를 매끄럽게 잘 이어갔다.

이름, 나이, 직업 등 전형적인 질문들이 쏟아졌고 나는 웃으며 하나씩 대답했다.



조금은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남자는 "좋아하는 취미가 뭐예요?"라고 물었다.



그때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기 시작했다.

'내게 취미가 있었던가?' 말문이 턱 하니 막혀버린 상태에서 뇌조직에서 필터링을 거치지 않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취미는 돈쓰기입니다!"



상대는 내 앞에서 함박웃음을 터트리며 배를 잡고 웃으며, "취미가 특이하시네요"라고 말했다.

졸지에 상대에게는 과소 비녀의 이미지를 심어주게 된 것이다.



소개팅의 마무리는 좋게 끝이 났으나, 서로의 가치관이 맞지 않아 우리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나의 취미가 영향이 없었다고 호언장담할 수는 없다.



별안간 한 번씩 그때의 소개팅남이 생각나곤 한다.

그 남자에게 미련이 있다기보단, 상대에게 나의 취미에 대해 다시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리고, 때에 따라 가식도 필요하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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