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성이 착한 사람들은 도망가야 할 상황에서도 책임지기 위해서 괴로워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잠들기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잠이 스르륵 드는 것인데 다큐멘터리 속 성우들의 목소리는 보통 따듯하게 느껴져서 때로 여름 이불의 온도와 겨울 이불의 온도 그 중간 어딘가의 온도로써 나를 포근하게 잠들게 한다. 일요일 오후 2시 그날도 그렇게 눈꺼풀이 잠기면서 나는 잠이 들려고 하고 있었다. TV에는 아프리카 초원에 얼룩말 떼가 무늬만큼이나 아름답게 쉬고 있었는데 곧 이 평화를 깨는 암사자의 등장에 나의 눈꺼풀도 깨어났고, 얼룩말들도 깨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초원의 법칙에서 암사자도 생존을 위해서 얼룩말을 향해서 전력 질주했고 얼룩말도 살고자 전력으로 도망쳤다. 평상시 종종 TV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보아왔던 이 장면이 그날에는 왜 그렇게 슬퍼 보였는지 나는 얼룩말이 도망치는 모습에 한참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날이 있다. 똑같은 일, 똑같은 사건이 나에게 전력으로 달려오지만 내가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해석되는 그런 날들, 그때의 나는 어쩌면 얼룩말의 처지였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때때로 살고자 도망을 쳐야 한다. 도망은 어렸을 때 배웠던 비겁한 사람만 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당신 살기 위해 얼룩말처럼 도망으로 달려도 괜찮다.
마음이 후련해지던 날,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오던 날, 길거리 벤치에 앉아서 평소에 마주할 여유가 없었던 저녁노을을 맞이하는 날, 이 모든 토막 순간의 나날들이 퇴사를 포효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나는 이 감정들을 그날 침대까지 끌고 들어가 숙면했는데 다음날부터 새로운 감정들이 나를 찾아왔다. 2주간의 후임자를 기다리는 시간은 또 다른 감옥으로 나에게 다가왔는데 이미 떠나버린 마음과 더 이상 들숨 날숨이 의미 없는 죽은 사무실 공간에서 정신적 감옥이라는 게 이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과 함께 괴로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나의 소식을 듣고 찾아왔던 영업사원 크리스는 유리문을 열고 괴로움에 갇힌 나에게 말을 건넸다. "도망치세요 뭐하러 그만두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줍니까? 누가 알아준다고요? 이거 오버하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쓰레기들이라서 이렇게 해줘도 몰라요. 이런 것도 알아주는 사람들한테 하는 거예요! 내 말 들으세요!" 나는 "그래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줘야죠. 깨끗하게 나가고 싶어요" 라며 웃으며 답해줬고 그는 답답하다면서 유리문을 열고 다시 나갔지만, 그 뒷모습이 계속 기억난다. 벌써 몇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의 말을 들었어야 할까? 그는 나에게 도망치라고 귓가에 소리치고 있었다. 크리스는 어쩌면 살기 위해 도망쳐봤던 용기 있던 얼룩말이 아녔을까? 시간은 흘렀고 나는 도망치지 않았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2주를 채우고 인수인계서도 바인더로 만들어서 전달했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고 그들은 끝까지 나의 정신과 육체를 괴롭혔다. 그러니 심성이 착한 사람들이여, 좀 나쁘게 살아도 좋다. 나빠지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그 누구도 당신에게 끝까지 책임을 묻지 않는다. 당신이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가고, 후임자는 알아서 적응한다. 쓰레기 더미에서 당신 같은 보석을 갉으려고 하지 마라. 무슨 사명감처럼 끝까지 책임을 다하려는 심성이 착한 이들이여 이미 죽은 얼룩말인 내가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이 한마디. 그 말은 그러니까... 당신...
끝까지 책임지지 않아도 괜찮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이후에 저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브런치에서는 쓸개를 제거한 이 이야기로부터 한편 한편 시간을 거슬러 뉴욕에서의 이민자로서의 회사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아울러서 저처럼 쓸개를 혹은 그 무엇이 되었든 제거하신 많은 분들이 있으실 텐데 그분들의 상실을 공감하며 응원을 드리며, 아직 쓸개처럼 삶에 고통받고 계신 분들에게는 잘 버티실 수 있도록 글로써 심심한 에너지를 전달해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