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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일러 문 Nov 08. 2024

사랑과 고독 사이,

건강한 경계선을 가진 고양이

시작은 항상 아가다. 굴러가는 낙엽에도 웃음이 나는 나이라 그럴까, 세상 모든 것이 즐거운 아가는 좀처럼 조용히 가을의 정취에 젖어들 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덕분에 집사나 루루 언니는 급격하게 식어버린 계절 속을 조금은 더디게 걸어가고 있다. 아가의 체온과 사랑의 온기로 그럭저럭 따순 가을이랄까.

언니 좋앙, 언니 놀장


시도 때도 없이 언니에게 다가가 장난을 거는 아가의 지독한 사랑으로 루가 어쩌면 조금 피곤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가만히 가을의 정취를 즐기고 있는 루루의 고독에 냅다 찬물을 끼얹고는 냥펀치와 머리채 잡고 뜯기 시전으로 정신을 쏙 빼놓다 불리한 타이밍 정색하며 백기를 드는 아가. 아가는 결코 방전되지 않는 '백만 스물하나, 백만 스물둘'의 에너자이져이기에 하루에 수십 번 루루와 집사들 품을 파고고 있다.

항복! 언니 우리 휴전합시다.

눈만 마주쳐도 고롱고롱골골골골 골골송에 시동을 걸고 다가와 온몸을 부벼대고 꾹꾹이를 해대는 막내의 과분한 사랑에 집사는 항시 백기를 든다. 가끔 해야 할 일들을 잊고 그 곁에 있는데, 언제는 뭐 그지 않았나. 생각해 보면 나는 거의 그랬던 것 같다.


기꺼이, 내가 할 수 있는 한나를 모조리 갈아 넣으며 살았다. 그리 최선을 다해 나를 내던지며 살다 보니 넘어지기 일쑤였고, 허둥허둥 대다 지쳐 쓰러고 나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회복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시간 같은. 청소기를 돌리고 나름 짧은 회복의 시을 보내는 가운데  빠듯한 오늘 일정이 슬 걱정된다. 골골송을 부르고 있는 고양이 옆에서 한 줌의 약을 입에 털어 넣고는 골골대, 비루한 로 충전 중.


건강한 경계선이 필요하다. 삶이 흔들리고 나서야 뼈저리게 알게 된다는 것이 문제지만, 다른 삶들을 잘 지켜내기 위해선 먼저 나의 삶이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루루는?

 


역시 고귀하고 위대한 고양이여. 그녀는 내가 사십 평생을 살아 간신히 깨닫고 있는 삶의 진리를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아가가 쉽게 오를 수 없는 선반 위나 2층 침대에 올라, 혼자만의 안락한 공간을 아지트 삼아 틈틈이 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조용한 공간에서 혼자만의 고독을 즐기며, 기꺼이 함께하여 행복할 순간을 위한 혼자인 행복 야무지게 긴다.


고작 다섯 계절을 살아본 4킬로 남짓의 작은 고양이가 이리도 야물딱질 수 있다니, 어떤 지혜는 시간과 크기에 비례하여 쌓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깨달으며, 이렇게 또 한 번의 행복모먼트를 지켜낸다.


건강한 경계선을 가진 고양이가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새삼스레 허덕이고 무너지며 홀대했던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사랑과 고독 사이에서 지혜로운 고양이의 삶을 바라보며 행복한 집사라 행복한 아침, 아침고독을 즐기고 있는 루루를 바라본다. 행복하고 행복할 것이다.

아가등장 "언니~ 뭐해?나랑 놀자." -루생크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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