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遊)신부의 대림절 ‘함께 걷는 기다림’
대림절 네 번째 주 월요일, 기다리며 읽는 마태복음서 (23)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 . .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 . .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마태복음서 25:41-45, 새번역)
“주님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십니까? 저는 주님이신지 몰랐습니다. 저는 배고픈 예수, 목마른 예수, 떠도는 예수, 입을 옷도 없는 예수, 아픈 예수, 갇힌 예수는 본 적도 들은 적도 그리고 배운 적도 없습니다. 그런 예수는 난 몰랐습니다.”
침묵하십니다.
“정말입니다. 몰랐습니다. 보지 못했습니다. 꿈에라도 주님께서 그렇게 하고 계실 줄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정말 몰랐습니다. 제가 알았다면 제가 보았다면 어떻게 주님을 못 본 채 했겠습니까? 설마 제가 그랬겠습니까?”
역시 말씀이 없으십니다.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냥 물끄러미 쳐다만 보십니다.
그런데, 정말 내가 보지 못한 걸까? 기억을 더듬습니다. 그런데, . . . 기억을 더듬다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다 혹시 기억이라도 나면 어떻게 합니까?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보지 않았던 것이라면,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라면, 보지 못한 척을 했었던 것이라면, 정말 내가 보지 못했던 게 아니었다면, 정말 그랬었다면 어떻게 하지?
차마 기억을 끄집어낼 수 없습니다. 지금 저를 보고 계신 저분의 얼굴을 더이상 볼 수가 없습니다. 그냥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때로 다시 돌아만 갈 수 있다면 그러면 이번엔 잘 할텐데.
“나, 돌아갈래!”*
그때 내 앞으로 무섭게 달려오던 기차가 바로 코 앞에서 정지합니다.
휴~, 꿈입니다. 하지만 깨서 좋은 꿈입니다.
“그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저 역시 그게 주님이신 줄은 까맣게 몰랐습니다. 그냥 그 사람들이 너무 안쓰러워서 그리고 너무 미안해서, 나도 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저 그들과 같은 사람이고, 나 역시도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걸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많이도 하지 못했고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하지만 설마 주님이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가만히 듣고 계셨던 그분이 마침내 말씀하십니다.
“나였다. 네가 본 사람들 그 가운데에 나는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사랑하는 딸들이고 아들들이고 또 나에게 너무 아픈 ‘못’이었다. 네가 그들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 그들 곁에 있어 주어, 나의 곁에 있어 주어 고맙다. 그때 네가 있어서 네가 찾아주어서 나도 그리고 그 사람들도 먹었고, 마셨고, 조금 쉴 수 있었고, 입었고, 많이 아프지 않았고, 외롭지 않았고, 그리고 즐거웠고 좋았다. 고맙다. 잘했다. 잘 살았다.”
그때 나를 안아 주시려고 두 팔을 벌린 채 오시다가 갑자기 멈추십니다.
아~, 꿈입니다. 하지만 깨서 싫은 꿈입니다.
어떤 꿈은 깨서 좋고, 어떤 꿈은 깨서 싫습니다. 어떤 꿈은 꿈이어서 현실이 아니어서 다행스럽고, 어떤 꿈은 꿈이어서 현실이 아니어서 몹시 서운합니다.
그러나 꿈과 현실은 생각만큼 서로 크게 다르지도 그 사이가 그렇게 멀지도 않습니다. 꿈 같은 현실, 현실 같은 꿈, 그리고 꿈이 되는 현실, 현실이 되는 꿈. 이쪽이 저쪽이 되고 저쪽이 이쪽이 되기 쉽상입니다.
“나는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보았습니다.”
그렇게,
누구는 그분을 ‘못 보았다’ 하고, 누구는 그분을 ‘보았다’ 합니다.
누구는 그분 손에 박힌 그 ‘못’을 ‘못 보았다’ 하고, 누구는 그 ‘못’을 ‘보았다’ 합니다.
누구는 그분의 아픈 사람들을 ‘못 보았다’, 그 사람들의 아픔도 ‘못 보았다’ 합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쳤다고 그냥 내 갈 길을 갔다고,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갔을 거라고 합니다.
누구는 그 아픈 사람들을 ‘보았다’, 그 사람들의 아픔도 ‘보았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너무 안쓰러워서 또 미안해서 그들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나 돌아갈래! 나 다시 시작할래!”
아닙니다.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돌아가 다시 시작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된다고.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 . .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마 25:34, 40)
12월이 끝나려면 열흘은 더 남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1월이 오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성탄절이 있습니다. 그분 오십니다.
* 영화 <박하사탕>의 그 명대사, 그 명장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