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遊)신부의 대림절 ‘함께 걷는 기다림’
대림절 네 번째 주 수요일, 기다리며 읽는 마태복음서 (25)
“각하, 세상을 미혹하던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사흘 뒤에 자기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흘째 되는 날까지는, 무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혹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가고서는, 백성에게는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속임수는 처음 것보다 더 나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 . . “경비병을 내줄 터이니, 물러가서 재주껏 지키시오.” (마태복음서 27:62-66)
“재주껏 지키시오.”
그게 어디 말처럼 쉽나요? 아무리 경비병을 많이 내준다고, 그것도 모자라 외국 용병을 트럭으로 데려와 밤새 지킨다고 그게 생각처럼 잘 지켜질까요?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입니다.
지금 ‘누구’가 ‘누구’를, ‘무엇’이 ‘무엇’을 지킨다는 것일까요?
그리고 지켜질 ‘누구’이고 지켜질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지키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오지 못하도록 지키고.
그런데,
그렇게 지켜질 아들이고 나라라면 그건 애초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도 아니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다고 한다면 굳이 애써 지키고 말고 할 필요도 없는게 아닐까요? 그냥 내버려 두어도 되지 않을까요?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전전긍긍 안절부절 노심초사하게 만든 것일까요?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또 사람들 시켜서 저토록 지키고 있게 만든 것일까요? 십자가 그 위에 계셨던, 그리고 이제 저 무덤 안에 계신 그분을, 죽었다고 자기들이 말을 해놓고 왜 저리도 지키고 있을까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왜 그럴까요? 다시 살아서 나올까 싶어?
“설마, 저 사람이 했던 말대로 정말 다시 살아날까? 살아 있을 때 했던 말대로 평화가 아니라 정말 칼을 주고 불을 주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나를 찌르고 내 것을 불 지르지 않을까? 진짜로 그러면 어쩌지?”
정말 그럴까 싶어 너무 불안하고 너무 걱정스러워 잠도 오지 않고 먹어도 먹는게 아니고 살아도 사는게 아니고, 이젠 슬슬 무섭기도 두렵기도 하고, ‘에이 설마, . . . 그래도 그렇지 이미 죽은 . . .’ 하지만 혹시 모르니 지키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그래서 저러는 걸까요?
그분께서 하신 말씀 하신 일들을 다는 머리와 가슴에 담아 두진 못했었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평화가 아닌 칼과 불을 주러 왔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 말들은 곧이듣진 않았어도, 믿지는 않았어도, 그래도 조금 담아는 두었나 봅니다. 용케 그걸 기억해서 저러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믿음은 시작이 되는 건 아닐까요?
그렇게 저는 생각합니다.
‘설마, 혹시, 에이 그래도 그게 . . .’, 그러나 그 말들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남아 자꾸 소홀한 틈을 타 생각이 난다면, 그건 믿음의 싹이 트고 자랄 틈이 생긴 탓 아닐까요? 벌써 믿음의 씨앗이 어느새 바람 타고 거기 간 것이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저는 합니다.
‘악플이 무플보다는 그래도 낫다’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어떤 연예인이 그렇게 말합니다. 지금 당장은 나에 대한 애정과 호감과 관심은 없어도, 적어도 무관심 보다는 악플이 낫다고, 그것도 관심의 일종이라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악플이 선플이 되고, 점점 나에게 애정과 호감과 관심을 갖게 되지 않겠냐고.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싶었습니다.*
무덤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저들, 그리고 그 지시를 따라 잘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무관심 보다는 저들과 그들의 저런 빗나가고 엇나간 관심(?)이 한 편으로 보면 믿음으로 가는 여러 길들, 그 길들 중에서 조금은 불편하고 힘겨운 많이 멀리 돌아서 가는 그 작은 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조금은 희망 섞인 생각, 저의 희망 사항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희망 사항을 넘어 저의 솔직한 바램이고 또한 믿음입니다.
십자가는 말합니다. 무덤은 말합니다.
지켜라. 지키고 지켜라. 어디 가지 말고 나를 지켜라. 의심과 불신과 불안과 근심과 걱정과 무서움과 두려움을 가득 담은 그 두 눈으로 꼭 어디 가지 말고 여기 나를 지켜라.
그때에, 어디 다른 데 가지 않고 잘 지키고 있는 그때에, 지켜보는 그 두 눈 사이로 네가 모르는 그 사이로 믿음은 겨자씨 한 알로 날아와 그 틈으로 뿌리 내리고 그 틈에서 자랄 것이다.
아무리 지킨다고 지켜도 저기 십자가는 그리고 여기 무덤은 다시 살아날 것이고, 살아 있고, 살 것이다.
그러니,
어디 가지 말아라.
어디 가지 말고 꼭 그 자리, 그 십자가를 지켜라.
어디 가지 말고 꼭 그 자리, 그 무덤을 지켜라.
그러면 꼭 볼 것이다,
그 십자가, 그 죽은 나무에서 다시 꽃이 피는 것을,
그 무덤, 그 죽은 땅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꼭 거기 지키고 있어 꼭 두 눈으로 볼 것이다.
그렇게 재주껏 지킨다고 지켜도 성탄절은 벌써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 악플의 위험성과 해악성을 우리 모두 너무 잘 압니다. 아무리 그래도 악(惡)플이 악(惡)플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