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오십니다

노는(遊)신부의 대림절 ‘함께 걷는 기다림’

by 교회사이


대림절 네 번째 주 목요일, 기다리며 읽는 마태복음서 (26)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찾는 줄 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는 살아나셨다. 와서 그가 누워 계시던 곳을 보아라. 그리고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기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나셔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될 것이라고 하여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다.”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이 엇갈려서, 급히 무덤을 떠나, 이 소식을 그의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달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여자들과 마주쳐서 “평안하냐? . . .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마태복음서 28:)


처음처럼 2 The Resurrection, Piero della Francesca, 1460s, Museo Civico, Sansepolcro.jpg The Resurrection, Piero della Francesca, 1460s, Museo Civico, Sansepolcro


“평안하느냐? 잘 있었느냐?”

어떻게 평안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잘 있었을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잘 있었냐고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때도 두려웠고 지금도 이렇게 두려운데,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해라. 거기에서 나를 만날 것이라고 그렇게 전해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갈릴리로 가라고 하십니까? 여기로 오라고 하시면 될 것을 왜 굳이 거기로 오라고 왜 거기서 만나자고 하십니까?


살아 계실 그때에도 다시 살아나신 지금에도 참 알 수 없는 주님이십니다. 어제 만난 것처럼 오늘 만나고 있다는 듯, 그리고 오늘 만난 것처럼 내일 역시 이렇게 만날 것이라는 듯,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으시다는 듯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하필 갈릴리입니까? 왜 갈릴리여야 합니까?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거기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만약 그 ‘거기’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제자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들은 어디로 달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찾을까요? ‘여기’라고 하시지 않고 ‘거기’라고 하셨으니 당연히 무덤도 그 십자가가 있던 언덕도 아닐테고, 그럼, . . .

예루살렘 성? 성전 안 뜰? 헤롯 왕의 궁전? 아니면 세상의 중심이라는 로마?

당연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그런 곳으로 달려가지 않을까요?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보자.”


그런데 다른 데 다 놔두고, 다른 곳도 많은데, 왜 하필 갈릴리로 가라고 거기서 만나자고 하실까요? 갈릴리를 벗어나려고 그렇게 무진 애를 써서 여기까지 온 제자들입니다. 새 세상 만들어 그 새 세상에서 보란듯이 떵떵거리며 살고 싶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데 왜 그 갈릴리로, 왜 굳이 거기로 다시 돌아가자고 하시는 지, 왜 거기로 오라고 하시는지, 왜 거기서 만나자고 하시는지, 도대체 그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서 무슨 선한 것이, 무슨 대단한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 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그 말이 혹시 가슴에 아직 남아 있어서 지금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시려고 그리로 가시려는 걸까요? (참조, 누가복음서 1:46)


오라는 데도 많고 갈 데도 많은데, 더 좋고 더 편안하고 더 안락하고 더 화려하고 더 웅장하고 더 근사하고 훨씬 멋진 데가 무진장인데, 왜 천대받고 무시받고 아프고 슬프고 가난한 그 지긋지긋한 갈릴리일까요?

하다못해 ‘나 다시 살아났다’ 증명이라도 하듯 무덤 밖이나, 아니면 ‘나 죽지 않았다’ 보란 듯이 저 골고다 십자가 언덕이나, 아니면 ‘이제 내가 왕이다’ 지척에 있는 예루살렘 성도 놔두고, 하필 왜 갈릴리일까요?


처음처럼 3 故신영복 선생님의 글씨, '처음처럼'.jpg 故신영복 선생님의 글씨, '처음처럼'


빈 무덤. 그 부활 이후의 삶은 어떨까? 다시 살아난다면 어떨까? 어떤 모습일까? 나중 거기는 어떨까? 어떤 모습일까? 어떤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정신 팔지 말라고, 거기에 관심두지 말라고, 거기에 집중하지 말라고, 자꾸 나중 거기만 보려고 하지 말라고, 그러지 말고 지금을 살라고 여기를 보라고 하십니다. 아프고 고단하고 가난한 지금 여기를 피하지 말라고 그 사람들 외면하지 말라고 고통과 고난의 현장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 성 안의 안락함과 궁전의 화려함이 아닌 성문 밖의 갈릴리로 가라고 하십니다.


시작한 곳 거기로 다시 가서 거기에서 시작하자고 하십니다. 그러나 똑 같은 삶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시작입니다. 전혀 다른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 새로운 시작도 그 가난한 곳에서, 그 변방, 변두리에서 시작합니다. 이제 그곳이 세상의 중심, 새 하늘 새 땅이 시작되는 새 창조의 공간, 새 창조의 시간, 새 창조의 시작점이 됩니다. 거기가 새 예루살렘의 시작입니다.


여전히 아프고 슬프고 가난한 갈릴리는 있습니다. 그 갈릴리로 가서 거기 갈릴리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처음처럼. 함께 시작했던 그 처음처럼, 그 시작한 곳에서 그 살던 곳에서, 지금 사는 곳에서 부활의 삶, 다시 살아난 삶, 달라진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난 듯 살지 말고 모든 것의 끝을 본 사람처럼, 새로운 처음을 본 사람처럼, 그래서 달라진 사람으로 달라진 삶을 지금 여기에서 살라고 하십니다.

그럴때, 내가 사는 ‘지금 여기’는 사뭇 달라진 장소, 다시 살아나는 장소, 빈 무덤의 장소, 그래서 다 함께 기쁘고 즐겁고 신나게 사는 ‘나중 거기’가 ‘지금 여기’ 된다고 하십니다.


처음처럼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지금 성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성 밖에 계십니다. 성 밖의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다시 사신 예수께서 처음처럼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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