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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 희 Nov 10. 2024

퉁치지 말 것!

상상 속에 숨겨진 열쇠


관객과 배우, 우리는 한 배를 탄다. '극'이라는 배, 허구라는 사실을 알고도 함께 탑승하는 배, 그 안에서 연기를 하고 관람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돈을 들여 극장을 찾는다. 여기에는 어떤 강렬함이 있는 걸까? 우리는 왜, 허구의 세계에 이토록 머물고 싶어 하는 걸까.


배우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영화에서는 시나리오, 드라마에서는 대본, 연극에서는 희곡이라 부르는 각본을 바탕으로 연기를 하는 사람들이 배우이다. 희곡을 검색해 보면 ‘어떤 사람이 강력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갈등하고 투쟁하는 모습을 관객에게 보일 목적으로 대사로 쓴 문학작품’이라 설명한다. 위의 세 가지는 각각의 (매체) 속성에 맞게 쓰이고 다른 경로로 관객들을 만나지만 공통적으로 배우는 ‘이야기’ 안에서 움직이게 된다.  


작가가 상상을 글로 풀어내면 배우는 그 글을 통해 상상을 일으킨다. 배우에게 상상력은 김밥에 ‘김’과 같이 지녀야 할 필수요소이다. 하얀 종이 위에 누워있는 검은 점들 속에 숨어 있는 정보들, 그러니까 각본 속의 인물들이 하는 말과 움직임, 장소, 날씨, 기분, 말투, 반응 등을 살아 숨 쉬게 하려면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여기에 나의 경험과 지식, 나를 둘러싼 세상 전부가 더해지면서 창조과정이 일어난다. 경험은 모두에게나 한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는 인물이 겪는 상황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며 존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시도를 해야만 한다. 유한한 내가 무한의 누군가가 될 수 있는 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완전한 통로, 그래서 잘 써야 하는 힘, 잘 발휘될 수 있도록 잘 닦아야 하는 것, 바로 상상력이다. 하지만 상상은 그냥 탄생되는 게 아니다. 빈 도화지에 상상이 더해지면 그냥 빈 도화지일 뿐. 


무엇을 상상하느냐 무엇으로 상상을 이끌어내느냐 하는 근원의 힘, 나는 이 사이에 있는 어떤 열쇠를 통해 내면의 소리를 얻게 됐다. 







한 독립영화에서 맡았던 인물의 직업은 미용사였다. 극 중, 커트와 파마를 시술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10년이 넘은 경력과 자신의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통 ‘꾼’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 미용사분께서 촬영을 도와주시기로 했지만 그분께만 의존하면 내 얼굴과 손이 같이 나오는 장면과 같은 다양한 shot을 촬영할 수 없기에 나는 기술을 익히는 일에 욕심을 부렸다. 도움을 얻고자 주변에서부터 건너 건너까지 미용사분을 찾아 나섰다. 가까스로 지인의 도움을 받아 미용학원 선생님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놀라울 만큼의 열정으로 기술을 알려주셨고 집에서 연습할 수 있도록 도구들 까지 전부 지원해 주셨다. 100억이 들어가는 상업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떤 보상이 없이도 기꺼이 도움을 내어 주시는 분이셨다. '만약 선생님이 없었다면 내가 이 장면을 찍을 수 있었을까? '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사함을 꺼낼 수 있는 길은 오직 최선의 기술로 장면에 녹여내는 일, 그것뿐이었다. 덕분에 해낼 수 있었다는 뿌듯함과 보람을 드리고 싶었다. 이걸 생각하면 허투루 흉내 낼 수 없었다. 촬영까지 남은 기간은 3개월, 집요함과 성실함으로 빗을 들었다. 


기술을 익히는 건 하나의 가지일 뿐, 이것부터가 시작이다. 미용사라는 옷이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줄 '이유'들이 필요했다. 미용을 시작한 계기부터 작업복이 있는지, 있다면 왜 그 옷 이어야 하는지, 가장 피로를 느끼는 신체부위가 어디인지, 스트레스와 어려움, 보람을 느끼는 부분들이며 왜 통굽 슬리퍼야 하는지, 사소한 것부터 인생 전체의 의미까지 연결고리가 있어야 했다. 당연히 오래 서 있으니까 통굽을 신겠지 하는 추측으로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배우인데요. 제가 이번에 맡은 배역이 미용사라.. 혹시..”



타당성을 얻기 위해 실제 미용사분들을 찾아갔다. 내 소개를 하고 인사를 드려도 대부분 경계를 하시거나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셨다. 몇 번 거절을 당해보니 오해를 받는 게 좀 억울하기도 했다. 그러다 이내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낯선 사람들이 얼마나 수시로 저 문을 열고 들어왔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자 그분들의 반응이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미용실로 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골목 안에 4~5개의 미용실이 줄지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가능한 건가?' 30여 년 간 모르고 살았던 이쪽 세계의 현실은 곧 나와 인물 사이의 메꿔야 할 간극의 다리, 내가 넘어야 할 산처럼 보였다.


원장님들이 들려주신 삶들이 까마득한 세상에 발을 들이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특별히 한 미용실에서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관찰을 하는 것까지 허락을 해 주셨다. 점심시간에 들어오던 햇살이 얼마나 졸리게 만들던지 머리카락을 뜨겁게 적시던 기운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그 햇살을 맞으며 꾸벅꾸벅 졸기도 했고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들을 말없이 기다리기도 했다. 중화약을 바른 손님과 친해져서 영화 홍보를 하기도 했으며 한 손님은 성형견적까지 내주셨다. 


이곳은 사랑방이었다. 별의별 이야기가 공중에 떠다녔다. 김언니의 험담부터 박언니의 성형소식, 최언니의 우울증, 강언니의 집안얘기까지 나는 듣고만 있어도 기가 빨렸다. 그런데 적당한 맞장구를 치는 원장님의 스킬이 과연 만만치 않았다. 잘 들어보니 김언니, 박언니, 최언니까지 전부 이 미용실의 손님이었다.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지만 듣는 사람이 섭섭하지 않을 만큼의 능숙한 맞장구 솜씨는 가위실력만큼 뛰어나 보였다. 쉼 없이 쏟아지는 말풍선을 전부 받아내면서도 손은 절대 멈추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미용사분의 뒷모습, 원장님의 등 뒤에서는 단순한 비즈니스 (행동패턴)를 넘어선 세월이 겹쳐 보였다. 어떤 기운으로, 불분명한 감정으로, 흐릿한 색으로 한 사람의 생이 보였다. '미용사'라는 명사에서 '한 사람'으로 생명력이 붙는 순간이었다. 


 10년 동안 미용실을 유지한다는 건 단순히 실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남달라야 했다. 손님이 원하는 스타일을 해냈을 때 제일 기쁘다고 말하던 원장님과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뿌듯함으로 버텼다는 원장님의 고백과 같은 의미가, 각자의 꿈에 젊음을 바친 세월이 내 인물에게도 생기길 바랐다.처음 가발 한 통을 다 말았을 때 꼬박 3시간이 걸렸다.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고 롤을 만 시간이었다. 원장님은 1시간이 걸렸다. 2시간의 간극을 무엇으로 메꿀 수 있을까, 그분들이 살아온 세월을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원장님들을 옆에서 보고 느꼈던 시간들에 상상력으로 20년을 곱하고 집에서 가발을 붙잡고 애를 쓴 시간에 상상력으로 10년을 곱한 세월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알 수 없는 진짜 삶의 투쟁이고 무슨 짓을 해도 만들 수 없는 굳은살이다. 나는 이렇게 퉁칠 수 없음을 배우게 됐다. 나의 상상들은 내가 만났던 그분들의 삶에서 태어났고 실제로 존재하는 그분들의 일상이 진실성의 씨앗이 되어주었고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우리는 허구를 보기 위해 기꺼이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불이 꺼짐과 동시에 기대와 즐거움들이 바깥세상의 짐들을 대신 들어준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수용적인 태도를 허락한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어느새 저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관객으로서 감동을 받는 장면은 인물에게서 내가 겹쳐 보일 때이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내가, 미래에 내가 보일 때 함께 아쉬워하고 즐거워하며 같이 눈물을 흘린다. 나는 그 힘이 진정성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 힘이 우리를 어두운 박스 안으로 계속 들어가게 만드는 끌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퉁칠 수가 없다. 그걸 알기에 그냥 넘길 수가 없다. 현장에서 만난 사람의 모발이 가발과 완전히 달라 손이 고장 나는 변수를 만나게 될지언정 그 순간에는 내가 미용사임을 잊지 않고 믿어야만 한다. 완벽하거나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어딘가 살아있을 사람이기에, 허구가 아닌 진짜의 삶을 살고 있을 누군가의 오늘이기에 진심에 가닿기 위한 노력을 그만 두지 않아야 함을 깊이 새기게 됐다. '상상력은 무언가를 믿게 만들어주는 힘이지만 진실한 마음이 없이는 날개를 펼 수 없다'는 배움이 이따금 눈 감고 넘기려는 나를 잡아주는 돌부리가 되어 내면에서 소리를 만들어 내는 중이다.  "야! 퉁치지 마.."










무엇보다도 당신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잊지 말아요. 

동시대를 함께하는 이들이 실존한다는 점을 늘 상기하면서 그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변화 하나하나에 민감해야 해요. 이것이 바로 삶의 비밀입니다. 견뎌내고 인생에 뛰어들어 실재하는 의미이죠. 돌에서 인간 영혼까지, 이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연극과 배우는 세상이라는 그림의 한 요소로 존재하지만, 배우 자신이 한 부분이 되지 않으면 전체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생애 첫 연기 수업, 연기 6강 중에서> 









@커버이미지 : @An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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