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 삶은 고구마
외부 평가 대신 나다움을 선택하기까지,
고민 많은 9년 차 마케터의 솔직한 회고.
여전히 일은 어렵고 매 순간 헷갈립니다.
정답은 없으니 그저 기록합니다.
고구마는 비교와 불안 속에서 자라나
나다움과 온기로 천천히 익어가는 중입니다.
오늘도 나답게 살고 싶은 당신에게 전합니다.
"그러니, 고구마 사세요"
어느 날부터 일이 싫어졌다.
정확히는 ‘싫다’는 감정이 먼저였고 이유는 뒤늦게 따라왔다. 알림이 울리면 불안감이 먼저 반응했고, 슬랙 창을 열기 전부터 어깨가 굳었다. 메일함은 늘 새로 고침을 기다리는 것처럼 무거웠고, 회의는 시작하기도 전에 피로했다.
근데 이상했다. 일을 싫어했다면 쉬면 좀 나아져야 했다. 주말이면 회복돼야 했고, 하루쯤은 가벼워져야 했다. 하지만 쉬어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쉬는 날에도 압박이 따라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야지 하면서도 아무것도 안 한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죄책감이 들었다. 잠으로 피로가 풀리기는커녕 잠에 잠식되었다. 일이 싫어진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내가 먼저 닳고 있었다.
번아웃 직전의 신호들은 생각보다 선명했다. 가장 먼저 나타난 건 몸의 작은 반란이었다. 커피 한 잔이면 출발할 수 있는 몸이 어느 순간부터는 커피를 마셔도 움직일 원동력이 생기지 않았다. 잠은 얕아졌다. 일찍 자도 중간에 깼다. 꿈을 꾸는 것처럼 정신이 계속 바빴고, 아침엔 이미 하루를 다 쓴 느낌이 들었다. 식욕도 이상해졌다. 배가 고픈데 먹고 싶지 않았고, 먹으면 속이 더부룩했다. 몸은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데 나는 그걸 그저 스트레스 레벨로 정리했다.
마음의 신호는 더 교묘했다. 나는 원래 일을 잘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고 그 마음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런데 번아웃 직전에는 그 마음이 압박으로 바뀐다. 끝나지 않는 무한 굴레에 빠진 듯했다. 일의 크기와 상관없이 모든 요청이 추가되는 짐으로 느껴진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도 커졌다. 집중이 떨어지고, 판단이 느려지고, 결국 더 오래 붙잡게 됐다.
그 상태가 반복되면 사람은 자신을 탓한다.
“내가 예전 같지 않다.”
맞다. 예전 같지 않다. 근데 그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연료가 바닥났다는 뜻일 때가 많다.
관계에서도 신호가 나온다. 사람과 연결되는 에너지가 부족해진다. 대화가 귀찮아지고, 답장을 미루고, 약속을 줄인다.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이 늘어난다. 그런데 혼자 있어도 편하지 않다. 머릿속에서 업무가 계속 돌아가고, 쉬면서도 쉬지 못한다.
그게 가장 위험한 상태였다. 바쁘니까 힘든 게 아니라 쉬어도 회복이 안 되는 상태. 권태도 아니었다. 차라리 권태라면 다행이지. 환경을 바꾸거나, 일을 바꾸거나, 목표를 바꾸면 되니까. 그런데 이건 그냥 고장 직전이었다.
회복은 의외로 드라마틱하지 않았다. 큰 결심이나 거창한 행동이 있던 것도 아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다시 세팅했다. 일어난 직후 따듯한 물을 마시고, 창문을 열고, 한걸음 걸을 걸 열 걸음 걸었다. 일의 덩어리를 더 세분화시켰고, 먹기 좋을 만큼의 한입 크기로 잘랐다. 무의미한 스크롤,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영상들도 멈췄다.
마음의 회복은 말보다 환경에서 시작됐다. 나는 내 감정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해도 괜찮아지지 않는 날이 더 많았으니까.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을 했다. 일정에 빈칸을 만들고, 회의 사이에 숨 쉴 시간을 확보하고, 필요 없는 미팅을 줄이고, 지금 ‘당장’이 아닌 일을 파킹했다.
조금 회복되고 나서야 알게 됐다. 나는 일을 싫어한 게 아니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던 일을 좋아할 수 없는 몸과 마음이 되어 있었던 거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 좋아하려면, 좋아하는 방식으로만 하면 안 된다. 좋아하는 일을 지속하려면, 지속 가능한 속도와 기준이 필요하다.
지금도 나는 가끔 경고 신호를 본다. 예전처럼 무시하지 않을 뿐이다. 피로가 깊어지면 몸이 먼저 말한다. 마음이 무거워지면 관계가 먼저 흔들린다. 그때 나는 묻는다.
“일이 싫어진 걸까, 내가 닳은 걸까.”
우리는 잠깐 멀어졌을 뿐, 무너진 건 아니다.
질문이 바뀌면
방향도 바뀔 테니까
오늘의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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