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도 가물가물 하다. 그러나 굳이 따져본다면 다꾸라는 말이 있기도 전인 아주 까마득히 오래전이었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어려서부터 끄적대며 쓰는 걸 좋아했다.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고 그날 그날의 일과는 물론 느낌까지 자세히 썼던 초등학생 때의 일기도 떠오른다.
4학년때는 일기장을 검사하시던 담임 선생님께서 깊어가는 가을의 심정을 잘 표현했다면서 친구들에게 소개해 달라고 요청을 하셨다. 수줍은 마음에 거절을 했다. 그때 만일 발표했더라면 당시 친구들은 내 글을 어떻게 평가해 줬을지 사뭇 궁금하다. 그 일이 있던 이후에도 글쓰기는 계속되었다. 지나고 나서 읽으니 내가 쓴 것이지만 재밌기도 하고 아이디어도 떠올랐다. 그래서 더더욱 일기를 재미나게 열심히 쓴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 많던 일기장의 분실은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쉽다. 가지고 있었음 나를 이해하는데 더 많은 도움이 되었으련만.. 그래도 지금까지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썼던 다이어리 일기장 멘트장들은 여태껏 내 보물들이다.
본격적으로 다이어리를 쓴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이다. 지금처럼 비싼 가죽다이어리 같은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문구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소박하고 얇은 다이어리였다. 아주 작은 공간이었지만 언제 어디서나 할 일을 비롯해서 짧게나마 내 마음을 기록할 수 있었다. 작디작은 칸에 축약되고 명쾌하게 쓴 단어와 문장. 그리고 더 많은 걸 토해내고 싶을 때는 일기장을 애용했다. 다이어리와 일기장의 기록은 그 당시 불안했던 여고생의 심정을 대변해 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빈칸이 하루하루 채워가지니 재미도 있었고 권수가 늘수록 뿌듯했다. 재미를 느끼니 당연히 계속 유지할 힘도 생겼다.
그 이후부터는 진짜 다이어리다운 가죽 다이어리를 사서 쓰기 시작했다. 매해 속지를 바꿔가면서. 매년 12월 31일이 되면 나의 한 해를 계획하며 큰 그림을 그리고, 또 한 해를 반성하며 성찰할 수 있는 그 시간을 즐겼다.
다이어리는 나의 루틴을 일깨워 주었고 나를 게으르지 못하게 막아줬다. 습관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지나고 나서 보면 내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알려주는 역사가 되었다. 나의 발자취였다.
하루의 시작과 마감을 기록으로 하는 날들이 늘었다. 그것은 내 몸에 장착되어 습관이 되고 삶이 되었다. 워낙 지류와 펜을 사랑하는 문구덕후인지라 다이어리도 예쁘게 꾸몄다. 스티커도 붙이고 도장도 찍고 그림도 그리고... 마치 다이어리란 문자만 기록하는 게 아니라 꾸밈까지가 한 세트인 것처럼.
내 맘속 찌꺼기들을 쏟아낼 수 있던 창구인 다이어리와 일기장. 책을 읽고 좋은 문장을 필사하거나 느낀 점을 쓰는 독서일기 음식점을 탐방한 후의 맛집일기
이런 것들은 내게 더 없는 소중함 그 자체였다.
결혼해서 엄마가 되니 다양한 종류의 다이어리가 필요했다. 초음파 사진부터 시작하여 태교일기 독서일기 이유식일기 홈스쿨일기 문화센터 일기 등 아이에 관한 다양한 육아일기로 확장되고 말았다.
아기를 뱃속에 품으면서 교감을 나누고 기다리는 과정인 태교일기 육아의 고통과 초보맘으로의 낯선 경험들을 헤쳐나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일상일기 음식을 맛보면서 신생아에서 유아로 변모하는 과정의 이유식 일기 단계별로 수준별로 읽게 되는 책들로 아이의 성향을 알게 되는 독서일기 문화센터나 수업 등을 통해 알게 되는 과정과 그 반응으로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는 외부수업일기
이것들은 곧 한 아이를 성장시키는 척도가 되었다. 다이어리를 쓰면서 나를 바라보고 나에게 집중했듯 육아일기를 쓰면서 아이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다. 큰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좀 더 계획적인 육아에 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