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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반지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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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빛그림 Oct 31. 2024

아무도 모르는 일_5(완결)



여자 둘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주방으로 들어왔다. 여자들은 각자의 도시락을 들고 식탁에 앉았다. 그들 중 한 명이 조리대에 놓인 상자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여자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상자를 들고 구석진 자리로 가서 앉았다. 갑자기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고 뭔가 잘못을 한 사람처럼 불안이 밀려들었다. 

여자들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밥을 먹는 동안 상자에 들어 있던 검은 봉지를 들고 냉장고 앞을 서성거렸다. 봉지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는 대신 봉지를 냉동실 안에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부주의하게 문을 여는 바람에 앞쪽에 있던 지퍼 백이 툭 떨어졌고, 밥을 먹던 두 여자가 바닥에 떨어진 만두와 나를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나는 만두가 든 지퍼 백을 주워들었다. 오랜 시간 갇혀 있던 냉기가 가차 없이 손으로 파고들었다. 그 단호한 차가움이 내게 예상치 못한 수치심을 불러들였는데, 그게 꼭 수화 샘 때문만은 아니었다. 갑자기 많은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고, 정확히 무엇을 후회하는지도 모르면서 그 상황을 바꿀 수 없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나는 만두와 검은 봉지를 식탁으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해치워버리듯이 가위로 봉지의 매듭을 잘랐다. 단내가 진하게 풍기는 참외 다섯 개가 식탁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아기 운동화. 식탁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참외를 멈추게 한 아기 신발이 있었다. 잔잔한 꽃무늬가 있는 연보라색 운동화는 새것이었다. 잘못 넣었을까? 

태아는 배 속에서 목소리로 사람을 기억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따지면 루시가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나일 것이다. 수화 샘의 바람대로 루시는 여자애였을까. 지금쯤 깨끗한 이불 위에 누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겠지. 건강한 모습으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으면 좋겠다. 루시가 가장 행복한 곳에 있었으면. 문득 루시의 삶이 못 견디게 궁금해졌다. 그리고 내가 한 생각이 얼마나 가소롭고 이기적인지 깨닫고 섬뜩해졌다. 세상에. 가장 행복한 곳이라니. 그런 곳이 있기나 한가. 

하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 일. 손바닥보다 작은 운동화를 만지작거리며 수화 샘의 전화번호를 기억해 보았다. 아직 익숙한 열한 자리 숫자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나는 망설임이 생기기 전에 얼른 전화기를 꺼냈다.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누구에게나 아기 운동화 한 켤레를 보관할 자리는 있을 터였다. 




그림_김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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