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날들 중 하루
이천 하고도 스물 새해 째를 맞이하며
한 해, 두 해 살아가며 늘어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생에 대한 관망(觀望)이다.
작년 이맘때 빌었던 새해 소원은 '랜덤박스'였다.
내가 믿는 신께서는 내 소원에 영 답을 않으시니 그분의 '선택'에 맡겨 보자는 얄팍한 노름이었다.
역시나 인상적인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고, 다만 보기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는 총천연색 '물체주머니'를 하나 받은 듯하다. 무엇을 만들어 내든, 그것을 보고 웃을지 울지 또한 내 맘이 정해 내야 하는 그런.
안타까워하고 애달픈 마음에 가슴을 치는 일들을 마주할수록, 그 마주함이 길고 많아질수록 관망(觀望)이 늘어간다. 무뎌진다 해야 할까? 무뎌짐 마저 익숙해진다 해야 할까?
아침에 눈을 떠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는 세상을 마주하여 까만 밤에 이부자리를 펼 때까지 무언가 내 가슴에 불을 당기는 이끌림과 흥분을 기대하곤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날들은 '아무것도 아닌 날들 중 하루'였거나 되려 '하루를 완주했음이 다행인 날들'이었다.
고상한 어휘와 깊은 조아림으로, 때로는 아이의 마음으로 구하였던 많은 소망들은 다 어디로 흩어졌나 이젠 찾을 수도 없고 기억 속에서도 흩어져 이젠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게 되어 버린 듯하다.
이것이 달관(達觀)이라면 다행일 테지.. 하지만 과연 그러한지는 의문이다.
그러니 이천 하고도 스물 새해 째를 맞이하는 이즈음, 이제 나는 관망(觀望)을 택할 수밖에.
그분의 선택에 맡겨 그 결과에 따라 행복을 맛보려 한 얄팍한 노름이 실패하였으므로 이제 내가 택할 수 있는 것은 한 해의 모든 시간과 현상들이 내 눈앞에서 어찌 돌아가는지 한 번 지켜보는 일 일테다.
사람인지라 바람을 온전히 접을 수는 없으나, 현혹되지 않고 그저 바라보고자 한다.
그래, 어찌 돌아갈 한 해 인지 말이다.
출세길 접은 지 오래고, 돈 세다 잠들 운명도 아닌 듯 하니 그 또한 바라는 바도 아니다.
다만 '먼 나라 소인이 찍힌 그립엽서 한 장 적어 보면 어떨까?' 하고 바다 건너 여행 정도 소망해 보다가도 그 역시 어찌 될지 한 번 지켜보기로 한다.
그리고 새해였던 시절이 또 한 번 저물면,
그간 관망한 모든 것들을 그저 펼쳐보려 한다.
그 때의 나에게 좋았던가, 아름다웠던가, 기뻤던가 하고 물어볼 요량이다.
바라는 것이 없으니 실망도 없을 것이고, 실망이 없으니 더 처질 구석도 없을 테지..
그래도 아쉬우면 '기억을 변주'하여 좋은 시절이었다 여기고 스쳐지나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