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의 애달픈 여정
애닯픔의 이유를 알게 하시려 그리 하셨나 보다
지구별에서 나고 진 모든 이에게 신이 내린 형벌은 허락된 시간의 유한함이자 무엇이든 되돌릴 수 없는 매 순간이다. 그래서 생의 결말은 늘 애달프다.
영문 모른 채 세상에 발을 디딘 아이는 '엄마', '아빠'를 시작으로 '나'를 만들어 나간다.
그리곤 어느 순간 '세상 이치를 모두 깨쳤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느껴질 무렵엔 세상의 중심에 서게 된다. 아니,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임을 모른 채..
세상이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한 없이 작고, 풋내 나는 모습이지만 세상에서 오직 그 스스로만 그 사실을 모른다. 모르면서도 영문 모를 의기양양한 호시절을 맞는다.
하지만 사실.. 그리 오래지 않아 알고 있는 모든 것과 내가 가진 것들의 알량함을 깨닫게 된다.
하나, 둘 세상의 벽을 느끼고 도처에 널린 돌부리들에 한 번, 두 번 걸려 넘어질 때 자신의 알량함을 목도하고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움츠려든다.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우리의 숙명적 여정임을 어렴풋이 알게 되고 할 수만 있다면 한 번쯤 이 여정의 시작이나 어려움을 모르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이 되돌림의 욕구를 '추억'이라 부르기로 했다지..
두려움은 한 번 느끼면 떨어지지 않는다. 떨쳐 내기 위한 몸부림은 되려 두려움의 굴레에 꽁꽁 결박해 버리고 만다. 여기에 '우리는 언젠가 죽게 되는 유한한 존재'임을, 작다면 이보다 작은 존재가 있을까 싶은 자아의 실체까지 알게 된다면 본능적인 '자기 방어'가 시작된다.
무시하거나, 오히려 조울증적 즐거움과 한 없는 무기력과 우울의 시간을 오가거나, 사람에 집착하기도,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상아탑에 들거나 신의 영역에 살게 되는 이도 생겨난다. 더러는 이 쯤해서 여정을 스스로 끝내 버리기도 하고.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생겨나면 자아를 조금씩 갉아 내어 그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기 바쁘고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나는 무엇이고, 여기는 어디이며 이 여정의 끝은 어디인가?'에 대한 막연한 물음을 입 속에서 굴리며 살게 된다. 한숨은 깊어지고 술잔은 한 잔, 두 잔 늘어간다.
'아버지가 마시는 술잔의 반은 눈물'이라는 어느 시인의 글귀와 같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될 때 또 한 번 애달프다.
이 한 방향으로 걷는 모든 이의 여정은 우리를 애달프게 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며 종국에는 '추억' 한 줌 떠올리며 생을 마감하는 결말을 맺게 한다.
왜.. 우리는 왜 이 여정에, 이 무리들에 섞어 한 방향으로만 발길을 옮길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 여정의 의미는 무엇이 건데 우리는 이 여정을 겪어 내야 하는 것인가?
이 길의 끝에 섰을 때 그 답을 알게 되겠지..
그때쯤에는 한 번 이 여정의 시작과 끝을 둘러볼 수 있겠지..
문득 그 끝에 서면 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 생에서의 여정이 나에게 허락된 모든 것이라면, 내가 오늘도 열심히 두 눈에 담아내는 것이 결국 무위로 돌아갈 한 때의 허상에 불과하다면 생은 더할 나위 없이 터무니없는 과정이다.
이 생의 끝이, 그야말로 항구적 끝이라면 말이다.
결국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곰곰이 생각한 알량한 조금의 깨달음, 그리고 내가 믿는 신께서 일깨워 준 바 대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겠다 싶다.
신은 우리에게 애닯픔의 이유를 알게 하시려 그리 하셨나 보다..
삶이 무엇인지 아는 영혼을 신의 세상에 들이고 싶으셨나 보다..
어디가 끝인지 모를 영원의 세계에 들여놓고 싶은 마음으로 우리에게 짧은 경험의 시간을 주시는 것은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 믿음이 진실이길 바라마지 않는다. 그래야 좀 마음이 놓을 듯싶으니까.
오늘도 영혼이 세상에 내리고, 또 어디론가 진다. 그 모든 영혼에게 '1'이라는 숫자가 표시되었다가 어느 순간 없어지면 그 영혼도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무수히 많은 탄생과 죽음을 목도하며 이리도 생각하고 저리도 생각하게 된다. 결국은 끝이 아니기를.. 오늘의 애달픈 여정이 오히려 시작이길..
그래서 오늘 죽음을 맞이한 이가, 언젠가 내가 맞이할 죽음이 시작부터 끝까지 애달픈 일만은 아니길 빌어 본다.
* 이 글을 '요제프 라칭거'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 나서 '베네딕토 16세'의 이름으로 선종하신 265대 교황께 바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