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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도연 Apr 28. 2021

가지 마, 가자미

방금 온 것 같은데 벌써 가버리겠다는 봄처럼

봄. 언제 왔다고 벌써 가니. 카페 화장실서 모기를 목격했다. 말라붙은 사체를 보니 벌써 며칠 된 모양이다. 잠시 집 앞 나갈 땐 반팔도 괜찮다. 크린토피아 문자도 잦아졌다. 자리 없으니 어서 세탁물 찾아가란다. 겨울엔 맡긴 지 두 달 지나도 연락이 없더니 이젠 이틀마다 독촉이다. 그래도 아직 봄은 봄인데, 봄이라고 부르기 애매하다. 계절은 4계절이 아닌 모양이다. 개나리 피고 벚꽃 흐드러지는 시기를 뽐, 이라고 한다면, 이 즈음 붐, 쯤 될까.


봄이 가면서 아쉬운 건 비단 날씨뿐만 아니다. 몇 주 전 처가 외삼촌께서 직접 잡은 가자미를 보내왔다. 외삼촌은 선장이다. 제철이라 보냈다는데 네이버 검색하니 10~12월이랜다. 읭? 정체가 뭘까 싶어 찾아보니 가자미류만 520여 종, 우리나라에만 20여 종이 산다. 용가자미, 물가자미, 기름가자미, 참가자미, 찰가자미, 범가자미, 노랑가자미, 거 참 이름도 많다. ‘봄 도다리’ 실 ‘문치가자미’. 가는 봄의 정체만큼이나 참 애매하다.


넌 이름이 뭐니?


어쨌든 가자미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기도 한다는데, 무려 뱃사람이 직접 잡은 가자미를 가자미라 불렀으면 가자미지. 녀석의 정체가 뭔지는 잊기로 한다. 우리 집 개그 고양이 하쿠가 러시안블루냐 코랫이냐, 마이클 잭슨이 백인이냐 흑인이냐, 영화 미나리가 한국 영화냐 미국 영화냐, 롯데가 한국 회사냐 일본 회사냐, 다카키 마사오가 일본인이냐 조선인이냐, 화개장터 이모가 전라도냐 경상도냐 따지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하다.


가자미를 잘 모르지만 식나 삭힌 요리는 어려서부터 즐겼다. 가자미로 뭘 해 먹을 수 있을까 궁리하다 직접 를 만나고는 깨달았다. 아아, 나 따위가 함부로 건들면 안 되겠구나. 여리여리한 살결 너머로 광활한 세계의 무자비함이 다 비치고 있었다. 얇고 가벼운 녀석이다. 겨우 이 몸으로 바다를 헤치고 살았구나. 힘겨운 세월이었겠구나. 고생 많았다. 동해와 남해 사이 어디쯤에서 날아온 외삼촌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꽤 괜찮았던 놈일세. 잘 부탁하네.”


팬을 잔잔하게 달군다. 가자미 군이 주인공이니까 우리는 엑스트라.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를 두른다. 열이 오르면 노련한 119 구급대원처럼 가자미 군을 천천히 눕힌다. 혹여 잔가시 하나도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조심스레 지켜보다가, 다시 몸을 뒤집어 반대쪽에도 온기를 더한다. 창백했던 피부가 노릇노릇 야무진 색을 찾는다. 잔가시에서 파삭파삭한 시장 통닭의 기운이 느껴지면 그릇에 안치한다. 마침 집에 며칠 전 사둔 감태가 있다. 따숩게 덮어줄게.


가자미는 입안에서 봄처럼 녹는다. 방금 온 것 같은데 벌써 가버리겠다는 봄처럼 부서진다. 감태에 감싸 입에 넣으면 바다다. 동해와 남해 사이 어디쯤에서 파도를 헤치던 느낌 그대로 감태의 촉수 사이사이로 힘차게 미끄러지다가 또 파도처럼 부서진다. 여리면서도 힘차게 미각을 흔든다. 좀 더 함께라면 좋겠는데, 얇고 가벼운 녀석은 금세 해체되고 빈 접시만 남는다. 혀끝에 남는 나른한 여운만 녀석이 여기 다녀갔었다는 걸 증명하는 흔적이다.


아끼고 아꼈지만, 몇 주 사이 남은 가자미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 사이 모기가 피를 쪽쪽 빨아먹는 여름의 기운이 스멀스멀 다가오면서, 가자미와 함께 한 봄의 기운도 쪽쪽 빨리고 있었다. 이름 모를 가자미들이 그렇게 갔다. 20여 종이나 된다고 하니 또 어떤 가자미에게는 아직 제철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봄에 만난 가자미는 아닐 거다. 가슴속 작은 설렘을 던져준 봄처럼, 이제 슬슬 보내줘야 하 거겠지. 언제 디선가 또 인연이 닿기를 바라면서.


고마웠어, 과연 가자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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